신년 초반을 음악, 독서, 미술, 영화로 채우며
새해가 되면 다들이 결심을 다지고 목표를 세우고 실행합니다. 2026년의 출발선에서 내가 선택한 방식은 분주함이 아닌 정신적 내면의 확장입니다. 이는 지난 한 해를 성찰하고 다가올 일 년을 지탱할 영혼의 양식을 축적하는 정교한 설계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음악) 매년 초 관례처럼 이어오는 신년 음악회 감상은 이제 삶의 중요한 의례로 자리 잡았습니다. 비엔나 필하모닉의 우아한 선율과 피렌체의 고풍스러운 음악적 공기를 안방이라는 사적인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은 기술적 매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복잡한 디지털 경로를 탐색하여 고화질 영상을 찾아내는 수고로움이 수반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예술을 향한 능동적인 구도 행위와 닮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생중계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년 새해가 되면 동영상을 찾아 헤매는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불편함조차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쉽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 그리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내가 먼저 접한다는 은밀한 자부심 같은 것 말입니다. 빈 필하모닉의 선율이 안방 가득 퍼져나갈 때, 무지크페라인의 황금빛 홀과 물리적으로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음악을 통해 그곳과 연결되는 묘한 감각을 느낍니다.
(독서) 지난 한 해 동안 독파한 백 권의 서적을 정리하는 작업은 지적 영토를 복기하는 시간입니다. 단순히 다독에 매몰되지 않고 그중 정수를 골라 10대 베스트를 선정하는 과정에는 엄격한 비평적 시각과 개인적인 철학이 투영되므로 이는 지식의 단순 수용을 넘어 자기화된 통찰을 추출하는 지적 고군분투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선택한 열 권은 이렇습니다. 『니체의 인생상담소』, 『불변의 법칙』, 『간화선』, 『집중하는 뇌는 무엇이 다른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3』,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페이머스』,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성장의 문화』, 『고래』이 책들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내 사고의 일부로 작동하는 책들이었습니다. 삶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나침반처럼 방향을 제시해주었고, 일상의 순간순간에 반복적으로 떠오르며 의미를 더했습니다. 이 열 권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나를 확장시켰습니다.
이 기록을 브런치에 기고하기로 결심한 것은 나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독서는 본질적으로 사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습니다. 기고하는 행위는 개인적 만족을 넘어 사회적 소통으로 이어집니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고, 스스로에게는 산재한 생각들을 논리적 문장으로 정제하는 기회가 됩니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휘발되기 마련이나, 문장으로 고착된 사유는 시간이 흐를수록 발효되어 삶의 근간을 이루는 단단한 지층이 됩니다.
(미술)신년 초반의 문화 활동은 미술로 이어집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오랑주리, 오르세 미술관 전시는 예상치 못한 선물 같았습니다. 특히 오랑주리관의 르누아르 작품들은 나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았습니다. 르누아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전시된다는 소식만 들으면 무조건 찾아갑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 앞에서 나는 10분 이상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두 소녀의 집중하는 모습, 손끝에서 흘러나올 것만 같은 음악, 부드러운 빛이 감싸는 공간. "행복만을 그리는 화가" 르누아르의 붓질은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공기와 온기, 시간의 질감까지 행복감과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찰나의 영원성'이었습니다. 지나가버릴 순간을 붙잡아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것. 그것은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마법입니다.
(영화)어제는 메가박스에서 『아바타: 불과 재』를 3D로 관람했습니다. 사실 나는 아바타 3부작을 모두 극장에서 봤습니다. 1편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3편은 1편 다음으로 좋았습니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아바타』가 감동적인 이유는 여러 겹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인간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별세계 판도라의 생태계, 공중에 떠 있는 산, 빛으로 물드는 숲을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던 것'을 눈앞의 구체적 체험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또한 인간의 몸을 벗어나 아바타라는 다른 육체로 옮겨 타고, 공중을 비행하며, 낯선 종족과 교감하고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대리 체험의 쾌감과 해방감을 제공합니다. 이때 사랑과 가족애는 단지 개인 감정에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문명과 종족 사이의 이해와 연대를 매개하는 정서적 다리로 작동하기에 더욱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이렇게 신년 초반을 음악, 독서, 미술, 영화로 채우며 문득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문화 활동이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양식이며, 내면을 확장하는 훈련이고,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경험하고, 책을 읽으며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그림을 보며 일상에서 놓쳤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영화를 통해 다른 세계를 상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웠습니다. 문화 활동을 많이 한다는 것이 마치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처럼 들릴까 우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각각의 경험을 얼마나 깊이 내면화하느냐일 것입니다. 100권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보다, 그 중 열 권이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 전시를 본다 해도, 르누아르의 한 작품 앞에서 10분을 머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습니다.
10년째 비엔나 신년음악회를 찾아보는 일, 르누아르의 전시라면 무조건 찾아가는 일, 아바타 시리즈를 극장에서 모두 보는 일. 이런 작은 습관들이 쌓여 내 삶의 결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은 과시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무엇에 시간을 쓸 것인가, 무엇에 마음을 열 것인가에 대한 일관된 선택의 결과입니다.
신년 계획을 세우며 '가치 있는 삶'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외부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세상을 예술적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지적 탐구를 멈추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하여 것입니다. 자신에게 솔직한 삶,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 자신만의 리듬으로 세상과 교감하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화 활동을 통해 영혼을 살찌운다는 축적과 성장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영혼은 아름다움과 지혜로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영혼은 단순히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느끼고, 더 넓게 공감하며, 더 섬세하게 세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보통 무언가를 채울 때는 무겁고 충만한 느낌을 받기 마련인데, 영혼을 채우는 일은 오히려 가벼움을 선사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불필요한 것들이 정리되고, 본질만 남았을 때 느끼는 명료함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좋은 음악, 좋은 책, 좋은 그림, 좋은 영화는 복잡했던 마음을 정돈하고, 흐트러졌던 생각을 정렬하며, 막혔던 감정을 흐르게 합니다.
2026년을 시작하며 이런 다짐을 해봅니다. 올해도 계속해서 영혼의 양식을 채워가리라고. 하지만 조급하지 않게, 과시하지 않게, 그저 내 속도로, 내 방식으로. 내년 비엔나 신년음악회를 또 찾아볼 것이고, 르누아르의 작품이 어디선가 전시된다면 또 찾아갈 것입니다. 좋은 책을 만나면 깊이 읽을 것이고, 좋은 영화가 개봉하면 극장을 찾을 것입니다.
한 해를 이렇게 시작하니 앞으로 펼쳐질 365일이 기대됩니다. 어떤 음악을 듣게 될지, 어떤 책을 만나게 될지, 어떤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될지, 어떤 영화가 마음을 흔들어놓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알 수 없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설렙니다.
결국 가치 있는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아름다움에 계속 마음을 열고, 새로운 경험에 호기심을 잃지 않으며, 작은 감동들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쌓인 경험들이 자신만의 내면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것.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
표지 사진: 2026.1.1 일출을 보려고 모인 사람들(삼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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