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이야기
꿩은 본 적이 없지만,
나는 꿩이 다녔을 법한 그 길을 안다.
가파르지도 않고 평탄하지도 않은,
사람이 놓치고 간 길, 풀들이 저마다 자리를 만든 그곳.
그 길목에서 마주친 이름 하나.
‘꿩의다리’.
이름이 꽃을 이기고 먼저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수없이 본 듯한 그 야생화.
바람에 실처럼 나풀거리던 꽃술은 꽃잎도 없었다.
그런데도 참 곱다 싶었다.
하늘하늘 떠다니는 여름의 공기처럼,
그 꽃은 조용히 피어 있었다.
꿩의다리는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이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꿩이 자주 드나들던 산자락에 자라서 붙은 이름이라는 말도 있고,
길게 뻗은 잎자루가 꿩의다리처럼 가늘고 날렵해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은 그 꽃을 꽃의 모습보다 자연 속 존재로서 먼저 기억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꿩의다리는 여전히 이름이 먼저 다가오는 꽃이다.
우리가 보통 꽃이라 부르는 모습에는 꽃잎이 없다.
꿩의다리꽃은 수술이 유난히 발달해,
마치 연보랏빛 실타래처럼 풀어지며 공중에 떠 있다.
바람이 불면 그 수술이 흔들리고,
그것이 마치 꽃잎의 움직임처럼 느껴진다.
처음 보면 "이게 꽃이야?" 싶은 생김새.
하지만 알고 보면 더없이 섬세하고 세련된,
꽃의 본질만을 남겨 놓은 듯한 아름다움이 있다.
식물학적으로 꿩의다리는 **Thalictrum(꿩의다리 속)**에 속하는 여러 종의 총칭이다.
우리가 산에서 흔히 마주하는 ‘꿩의다리’는 Thalictrum rochebrunianum,
즉 협의의 꿩의다리이며, 이외에도 은꿩의다리(Thalictrum filamentosum),
금꿩의다리(Thalictrum uchiyamae) 등 닮은 듯 다른 여러 종이 존재한다.
잎은 넓고 부드럽고, 꽃은 연보랏빛 수술이 둥글게 퍼지며 풍성하다.
보랏빛 연기처럼 꽃차례가 퍼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반면, 은꿩의다리는 키가 작고 유연한 느낌을 준다.
꽃은 흰색 또는 연한 보랏빛이며, 수술이 실처럼 길게 늘어져
마치 여름 안개처럼 피어난다.
잎은 가늘고 작으며, 잎맥이 선명하고 가장자리에 얕은 톱니가 있다.
또한 금꿩의다리는 이름 그대로 노란빛 수술이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줄기가 붉은 기운을 띠고 있으며, 다부지고 육중한 인상이 있다.
꿩의다리 무리를 처음 보면 모두 비슷해 보인다.
꽃은 다 고만고만하고, 수술은 다 하늘하늘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르다.
잎의 형태가, 줄기의 기운이,
피어나는 방식이 각자 다르다.
꿩의다리라는 이름 아래,
사실은 다른 길을 걷는 세 식물.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사람들과 닮았다.
서로 닮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자세히 보기 전엔 알 수 없는 차이.
그날 이후, 나는 꿩이 다니는 길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 길목엔 아마, 꿩의다리와 은꿩의다리, 금꿩의다리가
서로의 존재를 부딪히지 않으며 피어 있었을 것이다.
조용하고 섬세한 여름.
그 속에서 피어난 이름 하나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 본문 중 일부 사진 및 정보는 국립생물자원관 –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포털 의 공공누리 제3유형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출처 표시 및 원본 유지 조건에 따라 사용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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