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빗소리를 들으며 드립커피를 내린다.
창밖으로 흐르는 물방울이 창문을 적시는 사이,
주전자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갓 갈아낸 원두 위로 천천히 스며든다.
‘똑, 똑’ 떨어지는 드립소리는 마치 빗소리의 리듬과 겹쳐지듯 고요하다.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커피는 언제부터 우리가 마시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만약 커피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커피 없는 세상이라니,
도서관의 책장 사이도, 새벽 출근길의 전철 안도,
어쩌면 연인과의 첫 데이트도
무언가 본질적인 무게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매일 마시는 이 한 잔이
실은 아주 먼 옛날,
아주 낯선 땅에서 시작된 이야기라는 것을 새삼 떠올린다.
커피의 전설은 에티오피아에서 시작된다.
9세기경, 칼디라는 이름의 목동이 있었다.
그의 염소 떼가 어느 날 밤 붉은 열매를 먹고
밤새 잠도 자지 않은 채 활발하게 뛰어다녔다고 한다.
칼디는 그 열매가 특별하다는 것을 직감했고,
근처 수도원에 가져가 스님들에게 건넸다.
스님들은 처음엔 불길하다며 불속에 던졌고,
그 불 속에서 타오르던 열매에서
놀랍도록 향기로운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그 열매를 볶고,
우려내고,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기도 중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시던 수피교도들의 음료가
상인들의 낙타 등에 실려 예멘을 거쳐,
16세기 오스만 제국을 지나
17세기 유럽으로 퍼졌다.
파리의 거리에서, 런던의 골목에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커피하우스가
사상과 혁명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 커피가 들어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다.
19세기말, 고종 황제가 덕수궁 안 '정관헌'에서
서양식 커피를 처음 접했다.
황제의 궁중 음료였던 커피는
이내 다방과 근대문화를 타고 대중의 음료로 변모한다.
전쟁과 산업화를 지나,
편지보다 빠른 ‘인스턴트 사랑’이
믹스커피 스틱 속 설탕처럼 녹아들던 시절.
우리는 그렇게 커피를 통해
일상 속 낭만과 효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커피는 다르다.
향에 집중하고, 원두의 산지를 따지며,
로스팅의 정도와 바리스타의 손길에 귀를 기울인다.
그저 잠을 깨우기 위해 마셨던 커피는
이제 하나의 문화이자, 태도이자,
어떤 사람에게는 삶을 지탱해 주는 ‘루틴’이 되었다.
가끔 상상해 본다.
만약 지구상에서 커피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상상이 웃기다가도,
어쩌면 커피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무언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커피는 익숙한 외로움을 달래주는 향기이고,
잠시 멈춰 서게 만드는 시간이며,
내면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게 해주는 깊은 울림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의 커피는 ‘문화’보다 ‘정(情)’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문득, 오래전 고향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동구 밖에서 마중 나오신 할머니는
“워따매, 오래간만에 왔는데 커피 한 잔 해야지요.
내가 달달한 커피 맛있게 타 드릴게.”
하시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당시엔 종이컵이 없었다.
할머니는 커다란 대접에 커피믹스를 서너 개 툭툭 털어 넣고
주전자에 물을 팔팔 끓여
숟가락으로 휘휘 젓더니
그릇에 정성껏 따라 주셨다.
커피 향보다 더 진했던 건,
그 한 잔에 담긴 따스한 마음이었다.
그 시절엔 믹스커피가 ‘사랑’이었고,
‘환영’이었으며,
‘말없이 건네는 온기’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만든 이 믹스커피가
세계 최초라는 것도 어쩐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한 포에 담긴 단맛과 따뜻함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건네온 정과 너무도 닮아 있으니까.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을 두드리고,
내 앞엔 반쯤 비워진 머그잔 하나가 남아 있다.
커피 한 잔이 이끄는 생각의 여정은 그렇게,
오늘도 나를 한 뼘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중이다.
“오늘 당신의 커피에는 어떤 기억이 담겨 있나요?”
https://youtu.be/wgSy3-Yaa5w?si=7QALT6qQdNWu37L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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