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 이야기
오래 전, 인사동 쌈지길 위쪽 네 층짜리 낡은 건물에
‘사루비아’라는 이름의 다방이 있었다.
지금처럼 인사동이 북적이지 않던 시절,
그 골목은 오후만 되면 바람이 지나갈 만큼 한산했고,
그 조용함이 참 좋았다.
다방이 있던 4층, 그곳엔 내가 다니던 서실이 있었다.
커다란 창으로 햇살이 쏟아졌고,
가끔은 비둘기가 난간에 내려앉아 지붕을 내려다보았다.
묵향이 은은히 퍼지는 오후,
나는 그 공간 안에서
붓을 들고, 마음을 다잡고, 어른이 되어가는 법을 조금씩 배웠다.
‘사루비아’라는 이름은,
그때의 공기와 함께
지금도 가슴속에 조용히 물들어 있다.
우리가 흔히 ‘사루비아’라 부르던
이 꽃의 정확한 이름은 **살비아 스플렌덴스(Salvia splendens)**이다.
원산지는 남아메리카의 브라질로, 온대 지방에서는 주로 여름부터 가을까지 붉은 꽃을 피우는 일년초 또는 반내한성 다년초로 재배된다.
줄기 위에 촘촘히 달린 꽃차례는 마치 작은 불꽃 송이들이 줄지어 피어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루비아는 **꿀풀과(Lamiaceae)**에 속하는 식물로,
‘살비아(Salvia)’라는 속명은 라틴어 salvare, 즉 ‘치유하다’에서 유래했다.
이 속에는 약용 허브로 널리 알려진 ‘세이지(Salvia officinalis)’도 포함되는데,
사루비아는 그 가운데서도 관상용으로 개량된 품종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붉은 사루비아는 먹거나 약으로 쓰기보다는 보는 꽃,
눈으로 즐기고, 기억으로 간직하는 꽃이다.
그 다방의 이름이 왜 하필 사루비아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알 것도 같다.
사루비아는 무더운 여름에도 지치지 않고 타오르는 꽃이다.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선홍빛으로 물들고,
사람들 곁에 조용히 피어 있다가
바람이 불면 꽃잎 하나 툭 떨어뜨리는 꽃.
한 모금 커피를 마시던 오후,
그 다방 창문 밖에 보이는 풍경도,
서실을 감싸던 조용한 공기도
사루비아 꽃잎처럼
붉고 따뜻하고, 조금은 아릿했다.
사루비아에는 여러 꽃말이 전해진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불타는 마음’.
그 외에도 ‘존경’, ‘가족에 대한 애정’ 같은 의미가 함께 전해진다.
그래서일까.
사루비아는 단순한 화단의 꽃이 아니라,
어느 시절, 누군가의 가슴에 타올랐던 작고 뜨거운 마음을 닮았다.
그 시절 나도,
누군가를 향해 말없이 피워냈던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 다방도 사라지고,
그 공간에 무엇이 들어섰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인사동 골목을 걷다 보면,
가끔 뺨을 스치고 가는 바람결에서
사루비아 꽃의 기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이름,
사루비아.
내가 처음으로 붓을 들던 그 해 여름,
창문 밖을 물들이던 붉은 꽃잎의 이름.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한 시절의 흔적.
https://youtu.be/TOS4Ma3-4Jk?si=oIMaWkV3fWv-vgN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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