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귀뚜라미 이야기 / 귀뚜라미가 우는 이유

자연과 계절

by 가야

가을밤의 세레나데 – 귀뚜라미 이야기


이른 새벽, 창문 틈새로 서늘한 바람이 스며든다.


그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은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귀뚜라미 합창.


순간, 마음이 툭 하고 과거로 돌아간다. 아직 ‘가을’이라는 단어조차 잘 몰랐던 소녀 시절, 골목길 담벼락 너머로 들리던 그 소리. 가을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작은 음악가들은, 언제나 내 마음 한쪽을 서늘하게 흔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노래가 그들의 사랑의 노래이며, 인생의 절정이자 마지막 장이라는 것을.


귀뚜라미의 일생은 놀라울 만큼 짧다.


봄, 흙 속에서 조그마한 알이 깨어난다. 길이 3~4mm 남짓, 바늘 끝에 놓인 작은 점 같은 몸이 풀잎 사이를 서툴게 기어오른다. 날개는 아직 없고, 몸빛은 연한 갈색이나 연녹색. 그러나 그 작은 심장은 분명 계절의 리듬을 듣고 있다.

여름이 다가오면 부지런히 먹고 자라며 허물을 벗는다. 여섯 번, 많게는 여덟 번의 탈피를 거친 뒤, 마침내 날개를 달고 성충이 된다. 그 무렵이면 여름 매미의 합창이 잦아들고, 가을밤의 무대가 열릴 준비가 끝난다.

가을, 수컷은 앞날개를 비벼 노래하기 시작한다. 목소리가 아니라, 날개가 켜는 현악기의 울림. 이 소리는 암컷을 부르고, 경쟁자를 견제하는 사랑과 도전의 신호다. 밤이 깊어지고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그 울림은 더 선명하게 퍼진다.


사실 우리가 ‘귀뚜라미’라고 부르는 곤충도 종류가 다양하다.
가을밤 대표 가수는 **애귀뚜라미(Teleogryllus emma)**로, ‘귀-뚜-라-미~’ 하고 느리고 규칙적인 울음소리를 낸다. 몸집이 크고 날개에 두 개의 점이 있는 **흑점귀뚜라미(Gryllus bimaculatus)**는 빠르고 날카롭게 운다. 실내나 온실 주변에서 잔잔하게 우는 **집귀뚜라미(Acheta domesticus)**도 있다. 종마다 울음의 속도와 리듬이 달라, 귀 기울이면 서로 다른 파트가 어우러진 합창처럼 들린다.

암컷은 그 노래를 따라와 짧은 구애 끝에 짝짓기를 한다. 그리고 산란관을 흙 속에 찔러 넣어 한 번에 50~100개의 알을 낳는다. 평생 200개가 넘는 알을 남기고, 그 알들은 겨울을 견딘 뒤 이듬해 봄에 새로운 생을 시작한다.

◆ 덧붙여 전해지는 이야기들

중국에서는 귀뚜라미를 집 안에 길러 울음을 감상했고, 귀뚜라미 싸움을 즐기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귀뚜라미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 황실에서도 애호했다고 전해지며,

일본에서는 ‘스즈무시(鈴虫)’라 불리며, 맑은 종소리 같은 울음이 가을밤의 음악이자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소리라 여겨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귀뚜라미 소리를 세월의 덧없음에 비유하며 시를 짓거나, 유배지에서 들으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가을이 깊어가고 첫서리가 내리면, 귀뚜라미의 노래도 잦아든다. 짧지만 계절에 온전히 몸을 맡긴 삶, 단 한 번뿐인 무대에서 불태운 사랑의 노래.


https://youtu.be/-ZqPGne_2JI?si=TaZrryy9CfhkdWMQ


이른 새벽, 귀뚜라미 합창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그들의 삶이 유난히 가슴에 와닿는 건, 어쩌면 우리도 계절 속을 건너며 한 번뿐인 인생 무대에서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귀뚜라미 #귀뚜라미 우는 이유 #가을밤 #자연의 소리 #곤충이야기 #생태이야기 #귀뚜라미소리 #가을풍경 #곤충관찰 #자연다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베르가못(벨가못)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