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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야 Mar 12. 2024

걸리버는 거인도 소인도 아닌 "인간 레뮤엘 걸리버"다.

EXIT 17

걸리버는 거인도 소인도 아닌 “인간 레뮤엘 걸리버”다.     

절대적인 건 없다.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걸리버 여행기(1726)의 걸리버를

 단순 “거인 걸리버” 정도로 기억한다. 

하지만 조나단 스위프트 원작 “걸리버 여행기”를 끝까지 읽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빙산의 일각임을 알게 된다.

 “걸리버 여행기”는 총 4부이다. 

그런데 대부분 동화는 4부를 제외한 3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4부는 휴이넘이라고 불리는 “말”이 주인인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유럽은 인간이 아닌 말들의 세상을 가장 합리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그린,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가 신성 모독이라고 판단해 4부를 삭제해 발간했다고 한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작품의 의도를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른들을 위한 신랄한 풍자의 책인 “걸리버 여행기”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내 이름은 레뮤엘 걸리버다. 

내 아버지는 노팅엄셔 주에 땅을 조금 갖고 계셨으며, 

슬하에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나는 그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찬 꿈을 갖고 있었던 나는 아버지와 상의 끝에 케임브리지에 있는 엠마누엘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때 내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걸리버 여행기의 첫 문장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서두에 주인공이 “레뮤엘 걸리버”라는 걸 밝힌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으나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3년 만에 공부를 포기하고 한 외과 의사의 수습공이 되어 의사가 된다. 

세계 일주가 꿈이었던 걸리버가 “의사”라는 꿈을 정한 이유는

 당시 배마다 꼭 한 명씩은 필요한 게 의사였기 때문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 릴리퍼트, 거인국 브로브딩내그, 

떠다니는 섬 라퓨타, 말이 주인인 휴이넘스 랜드.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항해 중이던 걸리버는 어느 날 풍랑을 만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바닷가에 포박되었고 그곳에서 소인을 만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거인 걸리버”의 배경이 되는 소인국, 릴리퍼트.

 릴리퍼트 국은 사소한 이유로 옆 나라와 3년간 전쟁 중이다.

 싸움의 원인은 계란 깨먹는 방식이었다. 

릴리퍼트에서 계란은 밑이 둥근 부분부터 깨먹는 게 당연한 문화였는데

 이후 왕의 손자가 계란을 깨 먹다 손을 다쳐 왕이 계란 깨먹는 부위를 바꾸겠다고 발표한다.

 이를 두고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이 옆 나라로 넘어가면서 두 나라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정치 상황을 빗댄 풍자이자, 

영국과 프랑스의 설득력 없는 정쟁에 관한 비판이다.

 한편 소인국 사람들은 편협한 생각에 갇혀 타인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을 강요하는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두 번째 나라 거인국, 브로브딩내그. 

거인국에서 걸리버는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로 전락해

 사람들에게 묘기를 보여주고 돈벌이에 불과한 애완동물로 취급된다.

 힘없는 자들에 대해 불평등한 사회 제도에 대한 풍자를 보여준다.   

   


세 번째 하늘에 떠있는 라퓨타섬.

이곳 사람들은 똑똑해 보이나 현실에는 관심 없고 형이상학적 관념론에 빠져 있다.

 현실이 아닌 이데올로기에 빠져 민심을 놓치는 당시 정치가들에 대한 비틀기다.      


마지막 휴이넘스랜드.

인간이 아닌 말이 세상의 주인인 휴이넘스랜드.

 걸리버는 처음 방문한 휴이넘스랜드에서 적잖이 당황한다. 

     

“바로 그때, 암소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소를 가리키며 젖을 짜달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말이 작은 방문을 열더니 커다란 우유통을 꺼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말에게 우유 한 사발을 얻어 마시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곳은 완전히 거꾸로 된 세상이었다. 

이 세상은 말이 주인이었고 사람이 가축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야후라고 불리며 말들에게 천대를 받고 있었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 영리한 말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곳에서

 그는 모두가 평등하고 탐욕이 없으며 이타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을 통해 탐욕적이고 불평등한 현 사회를 비판함으로 

오히려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그려낸 마지막 휴이넘스랜드는 

이 때문에 출간 이후 거센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걸리어 여행기의 맨 마지막 문단,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걸리버는 가장 먼저 망아지 두 마리를 구입하고

 그들과 매일 네 시간씩 대화를 한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집으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망아지 두 마리를 구입한 것이었다. 

그 망아지들은 지금 훌륭한 마구간에서 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친구들과 하루 평균 네 시간씩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걸리버 여행기”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풍자와 당시 정치,

 사회상에 대한 신랄한 풍자의 작품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작은 아버지 손에 자라 실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조나단 스위프트, 

대학 졸업 후 영국 윌리엄 템플 경의 비서로

 문학과 종교, 정치에 관한 견문을 넓힌 그는 마치 걸리버와 같은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세상을 비난하는 글을 쓴다. 

“걸리버 여행기”의 “watcher" 관점에 ”조나단 스위프트“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거인도 소인도 아닌 레뮤엘 걸리버.”

“걸리버 여행기” 속 주인공 걸리버는 세계 일주라는 꿈을 이루며 여러 나라를 항해한다. 

소원을 성취하며 이국 땅을 밟은 걸리버

 매번 풍랑을 만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나라에서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소인국에서는 거인이 되고, 

거인국에서는 소인이 되며

 동물이 주인인 나라에선 인간인 자신이 새로운 개체로 낯설게 받아들여진다.

 네 번의 풍랑을 통해 이국 땅에서 낯선 괴물이 되지만

 풍랑 끝에 돌아온 자신의 고향에서

 그는 예전과 변함없는 “레뮤엘 걸리버”로 다시 살아간다.

 오랜 세월 모험을 하고 돌아와도

 그의 고향엔 항상 변함없이 그를 기다려 주고, 

있는 그대로 그를 바라봐주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   

   


릴리퍼트를 위해 싸우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나 

이후 왕궁 화재를 소변으로 진압하고

 식량을 축냈다는 이유 등으로 영웅으로써의

 그의 삶은 한순간 “괴물”로 매도된다. 

거인국에 가서 소인으로 산다면 좀 더 이상적일 수 있을까.

 정반대 상황에 같은 인물을 떨어뜨려 놓은 조나단 스위프트는

 독자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상황이 정확히 반대로 바뀐다고, 

예측했던 이상적인 상황은 오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한 시련이 기다릴 뿐, 

몸은 작아졌지만 걸리버는 그저 지배층의 장난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일 뿐이다.    

 

이쯤 되면 작가는 또 다른 상황을 펼쳐 보이며 독자를 실험한다.

 현명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존재한다면

 걸리버는 온전히 인정받는 인간 “레뮤엘 걸리버”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똑똑해 보이는 라퓨타 사람들은

 정작 현실은 보지 못하고 이상에만 사로잡혀

 자신이 아닌 남인, “걸리버”에 대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똑똑한 줄 알고 사는 사회 속에서 

그들은 “사람”이 아닌 “이상과 관념”이 더 중요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말들이 지배하는 사회, 휴이넘스랜드.

 동물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을 많이 닮은 야후족은 인간 세상의 가축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나은 지성을 가진, 휴이넘이야말로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유지하는 지혜를 보인다.  

    


“나는 이곳에 사는 동안 마음이 매우 편했다.

휴이넘들은 남을 배신하지도 않았고,

 사소한 이유로 싸움을 걸지도 않았다.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을 하지도 않았으며, 

뭔가를 얻기 위해 뇌물을 바치거나 아부를 떨 필요도 없었다.

 더구나 이곳에서 나는 도둑, 강도, 소매치기

, 거짓말쟁이와 같은 이들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걸리버 여행기”는 “절대성”이 존재하지 않는 풍자 소설이다. 

따라서 “레뮤엘 걸리버”는 거인도 소인도 아니다. 

주인공 “걸리버”는 그가 속한 사회와 조직에 따라 때로는 거인이 때로는 소인이 된다.

 시스템에 적응해 완벽한 “영웅”의 모습을 보이더라도 효용가치가 떨어지거나 

기존 시스템을 위협한다면 얼마 후 조직은 그를 가차 없이 내친다. 

그의 노력 유무와 상관없는 결말이다.

 최선을 다해 순간을 살아보지만 내 뜻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현실.

 시스템과 정권과 시류가 바뀌어 모두의 영웅이 “마녀사냥”이 되는

 요즘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날카로운 통찰. 

조나단 스위프트는 당시 영국의 정계와 사회, 

본인의 삶에서 깨달은 사실을 말하고자 과감하게 날카로운 펜을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가 자신의 고향과 가정에 돌아오는 걸로 끝맺음한다.

바뀌는 환경 속에서 역경을 이겨낸 그는 결국 “레뮤엘 걸리버”로 돌아왔다. 

그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그는 다시 안정을 찾고 말이 통하는 종족이었던 말들과 대화를 한다.

 수많은 모험 속에서도 “레뮤엘 걸리버”는 변하지 않았다. 

그가 있는 그곳이 그를 거인과 소인과 동물로 만들었을 뿐,

 그의 본질 “레뮤엘 걸리버”는 같았다. 

일본 애니 “너의 이름은”은 시종일관 “너의 이름을 기억해”를 외친다.

 “너의 이름만 기억한다면” 걸리버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 잊는다. 

걸리버의 거인과 소인은 사회가 만든 것이지 

“레뮤엘 걸리버”의 외양과 본질은 늘 같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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