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출이 일상이 된 사회, 공공재가 된 개인정보
한국인은 정(情)의 민족이다. ‘나’라는 개인주의적 단어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적 단어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회사, 우리나라.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그 아름다운 공동체 의식이, 기어이 21세기 디지털 세상에서도 꽃을 피웠다. 바로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통해서다. 이쯤 되면 진지하게 제안하고 싶다. 이제 ‘개인정보(Personal Information)’라는 옹졸한 단어는 폐기하자. 대신 ‘우리정보(Our Information)’라고 부르는 게 맞다.
‘우리’의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집 주소, 카드 번호가 정말 ‘우리’들만의 것인가? 중국의 해커도 알고, 동남아의 보이스피싱 조직도 알고, 어제 가입한 쇼핑몰의 제휴 마케팅 업체도 안다. 이제 우리들의 ‘개인정보’는 만인이 공유하고 즐기는 ‘공공재’이자 진정한 의미의 ‘우리정보’다. 기업들은 보안이라는 문을 ‘자동문’으로 만들어 놓고는, 털릴 때마다 “송구하다”는 이메일 한 통으로 퉁친다. 그들에게 고객의 정보는 금고 속에 모셔둔 보물이 아니라, 길가에 뿌려진 전단지나 다름없다. 그러니 우리도 마음을 고쳐먹자. 내 정보가 털린 게 아니다. ‘우리’가 함께 쓰는 정보를 해커들이 조금 적극적으로 열람했을 뿐이다.
정보 유출을 그저 피해라고만 생각하는 것 또한 너무 편협한 시각일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 개인정보 유출은 누군가에게 확실한 ‘혜택’이 된다. 개인의 명의는 대포폰 업자의 소중한 생계 수단이 되고, 카드 정보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쇼핑 자금이 되며, 온라인 계정은 사기꾼들의 활기찬 영업장이 된다. 당신의 부주의, 혹은 기업의 방관 덕분에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는 오늘 저녁 식탁에 고기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낙수 효과’이자, 글로벌한 ‘상생 경제’가 아닌가? 내가 피땀 흘려 번 돈과 신용이 얼굴도 모르는 지구촌 이웃들의 배를 불려주고 있다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인류애인가. 비록 내 통장은 탈탈 털리고 멘털은 바사삭 부서지겠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누군가는 분명히 이득을 보고 있다. 그것이 비록 범죄자일지라도 말이다.
‘우리정보’라는 이름은 책임 소재를 흐리는 데도 아주 탁월하다. 정보가 털리면 기업은 “우리의 보안 시스템이 뚫렸다”며 책임을 시스템 탓, 해커 탓으로 돌린다. 정부는 “우리의 법제도를 정비하겠다”며 매번 앵무새 같은 말만 반복한다. 결국 피해를 수습하고 비밀번호를 바꾸고 카드를 재발급받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건 오로지 ‘개인’인 나 혼자뿐인데, 부를 때는 ‘우리’라고 묶어버리니 얼마나 편리한가. 어차피 막을 생각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솜방망이 처벌 덕분에 기업들은 보안에 투자하느니 과태료를 내는 게 더 싸게 먹힌다는 계산을 이미 끝냈다.
그러니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자. 우리는 ‘정보 공유의 시대’를 넘어 ‘정보 강제 기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의 모든 사생활은 이미 공공도서관의 책처럼 대출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개인’은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우리’만 남은 이 서글픈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털린 내 정보를 보며 쓴웃음을 짓는 것뿐이다. 내 비밀번호가 전 세계의 공공번호가 되는 그날까지, ‘우리정보’의 공유는 계속될 테니까. ‘우리’라는 개념이 초국가적으로 확장하여 인류의 공동체 의식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이까짓 ‘개인’ 정보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