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저울질하는 사회

공정으로 포장된 혐오의 민낯

by 홍푸앙

2026년 1월 1일, 스위스 크랑몬타나의 한 바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는 새해의 희망을 악몽으로 바꾸어 놓았다. 수십 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고, 프랑스와 스위스 전역은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이 비극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화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진 사회의 반응이다.


현지에서는 그 누구도 “왜 거기서 놀고 있었느냐”고 묻지 않는다. 여론의 분노는 불꽃놀이를 허용한 업주와 안전 관리에 소홀했던 당국을 향한다. “축제가 비극이 되었다”는 사실에 함께 아파할 뿐,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거나 그들이 그곳에 있었던 이유를 캐묻지 않는다. 유럽 사회에서 여가는 삶의 당연한 권리이며, 안전은 국가가 보장해야 할 필수적인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참사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한국 사회는 비극 앞에서 습관처럼 피해자의 ‘무결성’을 심판하려 든다. 일터나 군대에서 발생한 사고는 ‘숭고한 희생’이나 ‘억울한 죽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축제나 여가의 공간에서 발생한 사고에는 “놀러 가서 죽은 것”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이른바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으로 대변되는 각자도생의 논리는 시스템의 실패를 개인의 불운이나 무능력으로 치환해 버린다.


가장 비열한 행태는 바로 ‘비교’다.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나라를 지키다 죽은 군인의 보상은 적은데, 놀다 죽은 사람에게 세금을 쓰는 것이 공정한가”라는 주장이 앵무새처럼 반복된다. 언뜻 보면 형평성을 말하는 듯하지만, 이는 명백한 기만이다.


군인과 산업재해 피해자를 혐오의 방패막이로 삼는 이들은 그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얼마나 목소리를 냈는가? 기업 활동이 위축된다며 산업재해 처벌 강화에 반대하고, 포퓰리즘이라며 군인 월급 인상을 비난하던 이들이, 참사 피해자를 공격할 때만 갑자기 ‘호국영령의 수호자’로 돌변한다. 우리는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애초에 그들은 노동자와 군인의 안전과 권리에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다. 단지 누군가의 비극을 깎아내리기 위해, 또 다른 비극을 잠시 빌려와 소비할 뿐이다.


그들의 논리는 “군인의 처우를 높이자”는 상향 평준화가 아니라, “군인도 푸대접받으니 너희도 바닥으로 떨어져라”는 하향 평준화의 저주다. 모두가 보호받지 못하는 지옥으로 함께 추락하자는 이 파괴적인 주장이 ‘공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횡행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안전을 보상처럼 여기는 태도’다. 안전은 좋은 일을 하거나, 국가에 기여해야만 주어지는 상(賞)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디에 있든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이다. “열심히 일했으니 살려준다”는 말은 곧 “놀았으니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끔찍한 논리가 된다. 산업 현장의 노동자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도, 축제를 즐기는 청년도, 국가가 보호해야 할 국민이다.


모든 죽음은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 없듯, 죽음에도 경중이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생산성이나 도덕성이라는 자의적인 잣대로 측정하며 “이 죽음은 무겁고, 저 죽음은 가볍다”라고 재단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 사회가 비극적 죽음 앞에서 저울과 계산기 대신 국화꽃 한 송이를 들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왜 그들이 돌아오지 못했는가”, “어떻게 하면 시스템을 고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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