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하루, 나 정말 잘 견뎠을까
아무 일 없어도 울컥하는 날들이 있다.
이유는 없다.
감정이란 게 꼭 사건이 있어야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냥 바람이 좀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날에도,
봄꽃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에도,
나는 늘 감정에 혼자 휩쓸려 버리고 말았으니까.
감정이 스며드는 방식은
폭포처럼 확 쏟아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슬처럼 조용하고 천천히
내 몸 어딘가를 적신다.
젖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엔 이미 늦어 버렸다.
감정이 기본값인 사람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오늘 내 마음의 상태를
느껴본다.
늘 내면에 잠재한 불안 때문에
눈을 뜨는 그 순간,
“나 혹시 어제 무슨 걱정이 있었던가?” 생각해 본다.
무엇이 나를 걱정하게 만들었는지 되짚어보는 것이다.
늘 내가 젖어버릴까 봐 미리 우산을 펼친다.
어설프게 잠에서 깬 날엔
걱정이 없다 싶으면 그대로 다시 잠들기도 하고,
자기 전에 품었던 고민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눈을 번쩍 뜨고, 그 걱정을 다시 이어간다.
그러다 보면
일어나기가 싫어지고,
오늘 하루를 살아낼 자신이 사라지기도 한다.
눈 뜨자마자 이어지는 걱정이
내 하루의 문을 막는다.
걱정을 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의 아침이다.
걱정이 없는 날은, 걱정을 만들어서 한다.
“컨디션은 괜찮은데 왜 이렇게 가라앉지?”
“아, 너무 피곤해… 오늘 하루 괜히 꼬이는 건 아닐까.”
같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밀려온다.
물론, 이유 없이 가벼운 날도 있다.
아무 일도 안 생긴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는 날.
출근할 때도,
아이를 돌보는 지금도,
아침 준비가 술술 풀리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오늘 하루를 내가 잘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생각 하나가, 천천히 어깨를 눌렀다.
출근을 하면, 먼저 회사 분위기를 살핀다.
부장은 오늘 기분이 좋은지,
내 옆자리 여자애는 오늘 컨디션이 괜찮은지.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아이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오늘 아침은 밥을 잘 먹는지부터 살핀다.
아이가 밥을 억지로 꾸역꾸역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엄마 또 이거야? 맨날 이것만 줘? 맛없어.”
“저번엔 잘 먹었잖아.”
“몰라, 이제 먹기 싫어. “
억지로 밝은 말투를 꺼냈지만, 이미 아이의 눈빛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와 싸우고 싶지 않은 아침이었다.
식탁 위엔 아이가 먹다 남긴 밥이 잔뜩 남아 있었다.
숟가락을 치우다 말고,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왜 내 아침은 이리도 고단한지…
일을 하면서도, 아이를 보살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늘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걱정이 따라붙는다.
남편이 한숨 쉬며 기분이 안 좋아 들어온 날은
나는 괜히 내가 잘못한 게 있는지 눈치를 본다.
누군가의 표정 하나, 말 한마디에
갑자기 온 하루의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다.
그 사람의 기분이 내 하루를 대신 결정해 버릴 때,
왜 나는 내 감정 하나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끼는 건지
내 머릿속이 원망스럽다.
다 같이 있을 땐 아무렇지 않다가도 혼자 남는 순간,
눈치보다 흔들린 내 마음이 울컥 올라온다.
눈치를 보다 보면 내가 먼저 움츠러들고,
그 사람은 잊었을 일에
나는 밤까지 마음을 붙잡고 있다.
낮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며 이불킥을 하기도 하고,
차마 하지 못한 말들에 뒤늦게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땐 왜 그 말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억울한 마음이 들고,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도 있고,
반대로 너무 지쳐버려 깊은 잠에 빠져드는 밤도 있다.
그런 밤들이, 하루하루 쌓여간다.
혼자 있을 때,
할 일이 없으면 다시 감정이 떠오른다.
갑자기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도 하고,
괜찮다가도 예전의 기억이 올라와
울컥해질 때도 있다.
감정을 정리하지 않으면,
감정이 내 안에서 계속 떠다니는 기분이 든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사랑하지만,
동시에 너무 벅차기도 하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쉽게 상처받고,
섭섭함을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몸 안에 쌓여 있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터져버린다.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상대가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고민해야 하고,
‘요즘은 왜 이 사람이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야 하고,
상대의 말에 담긴 의도를 파악해야만 한다.
때론 공감해 주다가,
그 사람 기분까지 내가 가져가버릴 때가 있다.
내 것도 감당 못하면서, 그 무게까지.
공감하지 않으면 냉정한 사람이 되는 세상.
그 안에서 나는,
감정을 계속 떠안으며 버티고 있다.
“오늘 하루, 나 정말 잘 견뎠을까.”
감정형 인간의 하루는 그렇게 또 흘러간다.
그리고 그 하루를 보낸 수많은 당신들의 문 앞에,
오늘 내가 너와 함께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