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소문은 담장을 넘어 삽시간에 파다하게 퍼졌지요.
“그 집 목련이년, 결국 바람이 났다대!”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겠냐는 게 동네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견입니다. 겨울 내내 조신하게 입고 있던 보송보송한 솜털외투를 염치도 없이 훌렁 벗어던지더니, 벌건 대낮에 희고 야스러운 ‘뽕브라’만 달랑 걸친 채 월담을 감행했으니 말입니다.
구경꾼이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가 팡팡 터집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목련이 왜 그토록 잎도 나기 전에 조급하게 꽃부터 밀어 올렸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단 하나의 꽃눈을 살려내기 위해, 제 살을 깎아 볼륨을 채우고 그 아슬아슬한 차림으로 세상에 뛰어든 이유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저년이 성형을 했네, 백옥 주사를 맞았네 떠들며 ‘목련 스캔들’이라는 자극적인 가십으로 떠들 뿐입니다. 적나라하고 도발적인 자태와 뽀얀 살결에 제각기 음흉한 시선을 덧칠하면서 말이지요.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도 저 목련의 ‘뽕’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떤 이는 번쩍이는 껍데기로 존재감을 부풀리고, 어떤 이는 가문의 영광을 부풀려 자존심의 날을 세우려 애씁니다. 돈 뽕, 명예 뽕, 젊음이라는 이름의 뽕…. 누구나 가슴속에 실체보다 조금 더 커 보이고 싶은 허영 하나쯤은 채워 넣고 사는 법이지요. 목련은 그저 우리 모두가 고상한 척 눌러 담은 인생의 거품을 정직하게 드러냈을 뿐인데, 우리는 제 가슴속에 있는 건 감춘 채 목련의 생살이 밀어 올린 당당함만을 비웃고 있습니다.
나무 위에 걸린 연꽃이라 하여 ‘목련(木蓮)’이라 불리는 저 고고한 존재도, 단 며칠의 쇼케이스를 위해 생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과한 스포트라이트가 독이었을까요. 화려한 찬사가 무색하게도 목련은 금세 갈색으로 멍이 들어 바닥으로 몸을 던집니다.
사람들은 이제 혀를 찹니다. 한때 눈을 떼지 못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시선들이, 이제는 바닥에 내던져진 낙화를 조롱하며 외면합니다. 그것을 몰락이라 부르지만, 한 시절 뜨겁게 부풀려 보았으니 미련 없이 벗어던지겠다는 뒷모습이 의연하기까지 합니다.
무참히 짓무른 낙화의 현장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는 결국 사라지는 것에 있다’고 말한 일본의 탐미주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무릎을 치며 반길 대목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마따나, 목련은 눈부신 한때에 머물기보다 기꺼이 바닥에 뒹구는 파격을 택했으니까요. 갈색 멍이야말로, 생이 정점을 맛본 자만이 내보일 수 있는 은퇴의 흔적인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여, 근거 없는 가십에 섣부른 판단일랑은 삼갑시다. 남의 집 담장 넘은 목련을 두고 바람이 났네, 몰락을 했네 떠들어대기 전에 낙화가 온몸으로 쓰고 있는 생의 비릿한 뒷면을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가장 화려할 때 떠날 채비를 하고, 가장 뜨거울 때 차갑게 식을 줄 아는 목련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큰 스승을 생각합니다. 내년 봄, 또다시 저 흰 뽕브라가 담장을 넘을 때, 나는 가십 대신 조용한 경배를 바치려 합니다. 인생, 가끔은 저 목련처럼 뽕도 좀 넣고 흔들어봐야 제맛 아니겠냐고, 싱거운 농담 한마디 툭, 건네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