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정원을 거닐다

우리들의 계절이 익어가는 시간

by 마음의여백

한낮의 공기는 이제 겉옷을 벗어도 될 만큼 따뜻하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눈을 밀어 올리던 복수초와 노루귀가 먼저 길을 내더니,

어느새 매발톱꽃과 히아신스, 깽깽이풀, 동강할미꽃과 네모필라와 스노플레이크까지 정원은 봄의 이름들로 가득 찼다.

목련이 부풀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길가를 밝히는 날.

카메라 가방을 메고, 아내와 함께 그 정원을 걸었다.


식물원에는 오늘도 꽃을 담는 사람들이 많다.

흰머리가 햇살에 반짝이는 한 어르신이

환한 얼굴로 이름도 낯선 꽃 앞으로 나를 이끈다.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꽃.

꽃대와 색이 비슷해 존재를 숨기듯 서 있지만

잎 위에 내려앉은 흰 털이 은빛을 머금어

은은한 빛을 품고 있었다.


— 셀릭스 헬베티카.

문득, 그 어르신의 모습과 겹쳐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는 빛.

드러내지 않아도 스며드는 존재.


나도 그렇게,

시간 속에서 조용히 깊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쪼그리고 앉아 꽃과 눈을 맞추다가

다리가 저려와 결국 바닥에 앉았다.


같은 꽃도

빛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작은 바위를 배경 삼아 프레임을 맞추고,

숨을 고르며 셔터를 눌렀다.


꽃과 눈을 맞추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머문다.


문득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은 이미 한참을 지나 있었다.


“또 점심 못 먹게 하려고?”


아내의 익숙한 투덜거림이 들려오지만

나는 또 한 번 앵글을 돌린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났다.


며칠 전에도 사진을 찍다가 시간을 놓쳐

문 닫은 식당 앞을 헤매다

결국 집에 돌아와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던 기억이 스쳤다.

그래도 아내는

오늘도 내 곁에서 기다려 준다.


정원을 걷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본 순간,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삼십 년 만의 재회.


그 역시 매주 이곳에 온다고 했다.

할미꽃이 피어 있는 자리와

깽깽이풀이 숨어 있는 길을 알려주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시간은 멀어졌지만

어딘가에서 같은 계절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수생식물원 근처에는

두꺼비와 개구리 모형이 곳곳에 놓여 있고,

물가에는 실제 개구리 알들이 떠 있다.

한편에서 흙을 고르던 분께 이유를 묻자

이곳이 예부터 양서류들이 대왕저수지와 인릉산 사이를 오가던 이동길이었는데,

주변 도로가 생기면서 그 흐름이 끊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이 정원은

사라진 길을 기억하고,

남아 있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조용한 약속처럼 만들어졌다고.


꽃을 찍는 일도,

이야기를 듣는 일도,

결국은 같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사라지지 않도록

기억하고,

남기고 싶다는 마음.


오늘 담은 야생화 사진은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는다.

기술은 아직 부족하지만

꽃과 눈을 맞추며 얻은 시간들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식물원을 나설 즈음,

시계는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행히 문을 연 식당을 찾아

늦은 점심을 마주 앉아 먹는다.


카메라 속 사진을 휴대폰으로 옮기며

또 화면을 들여다보는 나에게

아내는 한마디를 건넨다.

“이제 좀, 밥에 집중해.”


그 말에 웃음이 났다.


늦은 식사,

조용한 찻집,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흐르는 오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될 하루.

그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결혼기념일을

봄의 정원 속에 두고 돌아왔다

.

#시간은 꽃처럼 피어나지 않지만, #함께 걷는 사람 덕분에 #계절은 언제나 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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