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일곱에 회사를 그만둔 남자 아니 회사에서 그만두게 한 남자
일자리 못 구해 집에 있을 때도 쉬지 못했다 손 맞잡고 살 궁리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시나 쓰겠다고 끄적거리는 마누라 보아 주기
새벽에 나가기 별 보고 돌아오기 상사 눈치보기보다 더 바빴을 테다
귀신 들린 듯 써대던 마누라가 모 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눈물을 글썽일 때 섭섭하도록 빙그레 웃어줄 뿐이었다
유명 출판사에서 동시집이 나왔대도 시가 교과서에 실렸대도
빙그레 웃을 줄 밖에 모르던 남자, 당신 덕분에 시인이 되었다고
입을 귀에 걸어놓고 나불나불 나불대던 마누라
넋 놓고 주저앉아 우는 꼴 하늘나라에서도 보기 싫었을 게다
어서 일어나라고 일어나 좋아하는 시나 써 보라고 권했을 게다
눈이 퉁퉁 부어 터진 마누라 슬그머니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더니
키보드를 두드려대더니 이번엔 동시집 말고 시집을 내겠단다
빙그레. 빙그레. 빙그레. 웃는 모습 사무치는 모양이다
밤엔 더 아픈가 보다
그가 밤마다 소리를 지를 때
그녀는 안절부절 말했다
소리 좀 지르지 말라고
아래층에서 쫓아오겠다고
위층에서 신고하겠다고
후우 후우 심호흡을 크게 해 보라고
그때 그는 말했다
소리도 못 지르느냐고
소리도 못 지르느냐고
나중에는 힘이 없어
아프단 소리도 못할 그를
꿈에도 생각 못하고
그 나쁜 여자가 그랬다
소리 좀 지르지 말라고
소리 좀 지르지 말라고
침대 시트를 갈면서
괜찮아, 괜찮아
세탁기가 다 빨아, 괜찮아.
기저귀를 갈아주며
괜찮아, 괜찮아
버리면 돼
걱정 말고 싸.
양치질을 해주며
머리를 감기며
머리를 깎아주며
수염을 밀어주며
가죽만 남았네
뼈만 남았네
사타구니 씻기며
엉덩이 욕창 소독하며
손가락으로
관장약 밀어 넣으며
된 똥 파내며
무른 똥 훔쳐내며
아내는 생각했다
그때는 남편이고
지금은 아기다
남편을 태우고
병원을 누비며
놀이터라 생각했다
나는 엄마다 번역하고
휠체어를 유모차라 번역했다
병원 침대를 어디다 놓아야 하나
안방 침대 옆이면 좋겠는데
한 달도 넘게 사투를 벌이던 남편이
구사일생으로 퇴원할 때 큰 걱정이었다
침대와 휠체어는
환자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잘하면 들어갈 수 있어요.”
침대 설치하는 분이
병원 침대를
안방 침대 옆에 바짝 붙여놓았다
빠작빠작이지만
휠체어가 화장실도 가고
마루도 나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나처럼 붙여놓은 침대가
눈에 선하다
그날은 그렇게 기쁜 날이었다
그이가 이뇨에 좋다는
수박을 먹을 때
아삭아삭 소리가 좋았다
아삭아삭 소리
못 내어
수박을 믹서에 갈아 줄 때
걸쭉한 물을 받아먹을 때도 좋았다
곱게 간 수박을 고운체에 걸러
먈간 물만
마시게 되는 날이 왔을 때도
그런대로 좋았다
빨대 꽂아 입에 물려주고
먈간 물이 줄지 않아
애가 탈 때도
좋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도 나처럼 지겠구나.
휠체어에 앉아
베란다 화분에 핀
수국을 바라보며
마른 입술 달싹이던
그도
한 송이 꽃이었다
9월도 오기 전에
8월의 마지막 날
종잇장처럼 말라가던
그 꽃이
엄마 품인 듯
아내 품에 안긴 채
지고 말았다
참 따듯했던 꽃
지고도 따듯함은 지지 않았다
그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2년쯤 남았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
그녀는 눈앞이 캄캄
하루도 한 시간도 아까웠다
둘만의 버킷리스트라도?
그것도 손발이 맞아야지
그는 밥 사주기 노래만 했다
강직에 겸손한 박 경위 밥 사 주기
말없이 봉사활동 함께 한 정광자
밥 사주기 자기 마음 헤아려주던
진 선생 밥 사주기 술 좋아하는
김석원 씨 술 사주기 바람만 스쳐도
토라지는 조 선생 술 사주기
성당 레지오 부단장 밥 사주기
그동안 못 만났던 외사촌 만나기
고향 마을 경로당에 기부금 내기
더러는 실천하고
더러는 노래로 끝난 버킷리스트
오만 원짜리 두 장을 작은 지갑에
따로 넣으며 박 경위 밥값이라 했다
네?
안보이신다 했더니
그까짓 밥 한 끼도 허용 못한
경찰, 박 경위가 흐느꼈다
망자의 아내가 전하는 금일봉을
뿌리치며 눈물을 쏟았다
당신은 솔 냄새를
유난히 좋아했지
의릉 소나무밭을 돌며
당신과 내가 흠흠
코에 대보며 주워 온 솔방울
솔 냄새 여전히 좋은데
차마 혼자 맡기 눈물 나네
그래, 제 자리에 갖다 놓자.
솔방울을 가방에 담아놓고
아직 못 갔네
오늘은 왜 혼자 오셨어요?
소나무가 물을까 봐
쉼터 의자가 물을까 봐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내일은 솔방울 가방 메고
의릉에 가는 대신
당신한테 가려하네
꽃다발 두고 오듯
당신 머리맡에 두고 오려하네
지인에게 배운 인사
늘 하던 잠자리 인사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쥐어 본다
꼭 꼭 꼭(사. 랑. 해)
그도 희미하게
내 손에 신호를 보낸다
꼭 꼭 (나. 도)
힘이 하나도 없네!
힘 좀 주어봐
여보,
힘 좀 주어보라니까
없는 이 손을 잡고
투정을 부려본다
언젠가 그랬지
여관방 서랍에
옷을 넣어 두고
그냥 돌아와
깜박했다 했지
자기 대신 누군가
잘 입으면 좋겠다. 했지
여기가 여관방인가
옷장 서랍에 차곡차곡
속옷까지 개켜 넣고
그냥 가 버렸네
입어 보니 편하네
헐렁하니 편하네
누나, 혼자는 좀 그렇지?
남동생이 와서
조심스럽게 내놓은 말이다
엄마 볼 용기가 안 난다.
동생을 따라가며 내가 한 말이다
사위 좀 워떠냐?
많이 안 좋으냐?
사위나 돌보지 뭐라 왔니?
사위가 워떤 사윈디
내가 얼른 죽어야는디
늙은 어머니가
늙은 딸 손을 잡고 한 말이다
엄마 걱정 마
황서방 많이 좋아졌어.
밥도 잘 먹어.
어머니가 결국
참고 있던 딸을 울렸다
꼭꼭 접은 봉투를 손에 쥐어주며
사위 맛있는 것 사 주라 하셨다
어머니 96세, 우리 어머니
고맙습니다.
딸에게 건강을 물려주셔서
당신 맏사위 병시중 무사히 마쳤습니다
기다리던 만남처럼
이별도 삼일을 맞고 보름을 맞고
속절없이 오십일을 맞아
당신 나무 곁에 국화꽃 심고 왔네
백일도 오겠지 백일 되면 어떨까
삼백육십오일 되면 어떨까
오백일 되면 어떨까 천일 되면 어떨까
3천 일 1만 일
세다가 지쳐 몇 날인지 모르면 좋을까
밤 열두 시에
새로 두 시에
네 시에
신음소리 없는데
보살필 사람 없는데
자동으로 깬다
깰 때마다
졸음과 싸웠는데
이제는
불면과 싸운다
침대가 넓다
좁던 방이 너무 넓다
마루는 넓다 못해 휑하다
창밖에선
밤비가 내린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금싸라기 땅 육천 평을
아내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형에게 주었다네
산소 자리가 있으니
종손, 자기 아들 주자는
형의 말에 아우는
두 말 없이 인감에
인감도장까지 주었다네
또 그랬다네
이제부터 한 십 년
재미나게 살자고
아내와 한 약속
헌신짝처럼 버리고
훌쩍 떠나버렸다네
바보 천치 멍청이!
한 겨울에 찬물 퍼붓듯
아내는 퍼붓고 싶은데
창호지 문인가
가슴만 미어진 다네
어쩌다 한번 울리는
집 전화벨이 울렸다
그와 한 동네서 자란
그의 여자 동창이다
그 착한 사람이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물었다
성당 교우이기도 한 그녀
소식들은 그날부터
백일 연도를 시작했단다
친구들이 장례식장에 달려와
눈물바람 하더니
백일기도 해 주는
여자 친구까지 있구나!
고맙다
친구 복 많아서
당신은 좋겠다.
잠자리 들기 전에
사용하던 원통형 목도리
생각 나?
당신 감기 들까 봐
초겨울부터
당신 머리에 푹 씌워주던
목도리들 중에
꽃무늬 목도리
생각 나?
여자 목도리
안경도 안 벗기고
둘러 씌웠다고
정색을 하고 눈 흘긴 거
생각 나?
그때 낄낄대던
덜렁장이 마누라
잘 있는지 안 궁금해?
그 목도리
마누라 목에 감긴 거 보고 있어?
자다깨다자다깨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다섯 반이었어
여섯 시 미사잖아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얇은 스카프 두르고
늦겠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갔지
보슬비가 내리는 줄은 모르고
감기 들어, 우산 쓰고 가.
등 뒤에서
당신 목소리가 들리더라
우산 가지러 다시 올라갔지
당신 목소리 때문에
새벽에 우산 쓰고 뛴 거 알지?
조금 늦으면 안 되냐고?
안 되지
당신을 위한 연미사인데
안되지
전셋집을 옮길 때도
우리 집을 장만할 때도
당신은 언제나 그랬지
새벽에 출근해 별과 함께
돌아오니 어쩔 수 없었지
병원에 누워 있으니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지
단 둘이 살 마지막 집인데
자기 먼저 갈 집인데
아들과 함께 보러 갔지만
여기가 좋겠다,
언제나 그랬듯
결정은 또 내가 했지
거기 있어보니 어때?
옛날에도 그랬잖아
코딱지만 한 단칸방도
살다 보면 좋았잖아
머지않아 나도 갈 거야
둘이 함께라면 거기도 좋을 거야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때
상 받으러
부산에 혼자 가서
심사위원께 혼났지
남편과 함께 오지 않았다고
마음 해 두었던 일
15년 후에 이루었네
방정환문학상 받는 날
남편 수술받는 날을
아슬아슬 피해서
기적처럼 이루었네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 발짝도 버거운 발걸음
아닌 척
나란히 단상에 오른 남편
웃고 있어도 나는 알았네
그날은 참 그랬다고
빙그레 웃고 있네
라일락꽃 피던 5월에
상 받는 아내 옆에 있었다고
말없이 빙그레, 웃고 있네
당신 회사 그만두고
집에서 쉴 때 살짝 내비쳤지
그런 줄 몰랐다고
맞아 나 게으른 여자
설거지 쌓아놓고
피곤하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프다
한숨 자는 여자
한숨 자고
부스스 일어나면
집안은 깨끗하고
머리는 맑아졌지
청소기 잘 돌리고
정리 잘하던 당신 없으니
누가 볼까 두려워
한숨 자려다가 설거지하네
대충대충 청소기 돌리네
당신 그것도 알고 있었지?
게으름이 내 건강지킴이라는 거
게을러서 미안해
나만 건강해서 미안해
벌써 11월 5일이네
작년 이맘때는 그래도 백화점에 가서
당신 따스한 겨울 바지와 티셔츠를 샀지
뼈만 남은 몸에 입히며 울음을 삼켰지.
어제는 당신과 걷던 솔밭에서
손가락 갈퀴로 솔잎을 긁어모으며 울고
오늘은 헐벗은 당신에게
노랑 솔잎 이불 덮어주며 기쁘네
50일에 심어둔 국화꽃 생기 돌아 기쁘네
국화꽃에 앉은 나비도 기쁘게 하네
둘러보니 첩첩이 단풍!
작년에 당신 때문에 구경 못한 단풍을
당신 옆에서 보니 기쁘네
눈물은 기쁠 때도 쏟아지잖아.
어른이 계신 집에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고
자식들에게 내가 하는 말이다
둘만 사는 집에
내가 나갔다 들어올 땐
집에 있는 그이가 어른이고
그이가 나갔다 들어올 땐
내가 어른이었다
현관문 열고 들어오면
그이는 내 손부터 보고
그이가 들어올 때 나는
그의 손을 살폈다
어른이 집에 없으니
빈손으로 들어와도
무방하다, 무방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자식들이 헤아린 듯
시시때때로 들고나며
맛있는 것 대령하나
어찌하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 아이스크림 봉지가
이 겨울에도 그립다
사윗감 선보러 천안에 간
아버지 해가 져도 안 오셨네
그 총각 마음에 안 들어
전에 본 총각을 한 번 더 보러
인천에 가셨었다나
인천 총각은 출장을 갔더라나
아버지 허탕치고 허탈하게
다음 날 저물녘에 오셨네
중신아비 성화 때문이던가
천안 총각과 맛 선을 보며
키도 자그만 얼굴도 자그만
아버지 마음 알 것도 같았지
귀신이 들렸나 씌웠나
주책없이 글쎄 이 남자를
평생 도와줘야 할 것 같은
예감을 물리칠 수 없어
덜컥 약혼 사진을 박아버렸지
약혼 사진을 보고 어른들은 말했지
둘이 닮았다고
아득하나 어제 같은 옛일!
돌아보니 예감대로 산 셈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