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들의 다수는 서로마의 붕괴(476년)를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본다.
서로마 붕괴 이후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교황은 서유럽의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위상뿐이 아닌 정치적 중재자이자 권력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특히, 서방 교회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590~604년 재위)는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고 로마와 주변 지역을 안정시켜 게르만족 국가들의 기독교화를 촉진시켰으며 신도들의 교화를 위한 미술의 회화적 표현에 대해서도 수용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조각된 형상 등 우상 숭배와 관련된 모든 표현이 금지된 시대적 상황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여 미술가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며 명확하고 단순함 만을 강요받아 점차 엄격하고 본질적인 표현에만 집중하게 하였다. 이것은 마치 중세 시대에 이집트식 미술을 그리라는 강요와 비슷한 것이었다.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 빵과 물고기의 기적 / AD 520년 경(좌) 이집트 <사자의 서> / BC 1275년(우)
결국, 이러한 제약은 미술가들에게 표현 기법을 달리(모자이크, 이콘 등)하게 만들었으며,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강화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변모시켰다. 당시 대표적인 교회 건축물이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지어진 <성 소피아 성당>이다. 약 3차례의 재건을 통해 완성된 이 성당은 고대 후기의 건축 양식과 동로마 제국의 건축술이 합쳐져 만들어진 당시 가장 큰 규모의 성당으로 돔의 직경이 30m에 이른다. 건축 당시 내부는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되었으나 8세기 경, 교회 내 성상 파괴 운동으로 이 벽화와 모자이크는 모두 지워지거나 파괴되었고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성상 모자이크들은 843년 이후 만들어진 것들이다. 참고로, 하기 왼쪽 사진의 4개의 뾰족한 기둥은 '미나레트'라 불리는 이슬람 모스크의 탑으로 오스만 제국 시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하며 세워졌다.
성 소피아 성당 전경 및 코린트 양식 기둥과 문양 / AD 562년
건축 당시, 성 소피아 성당 단면도(좌) 및 3D 조감도(우)
비잔틴 미술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콘(Icon)의 성행으로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모자이크와 더불어 중요한 신앙적 표현 수단이었다. 이콘은 성인,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종교적 그림으로, 통상 정면으로 그려지며 전신 혹은 머리와 어깨만 보인다. 또한, 신과의 소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보는 이(시청자)를 직접 응시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기도하는 인물을 더 잘 이해하고 신과 인간 사이의 교감을 돕는 역할을 했다. 지금의 아이돌 모습이 새겨진 포토 카드와 유사한 개념이다.
현존하는 이콘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이집트 동부의 시나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카타리나 수도원의 <판토크라토르> 목판 이콘이다. 판타크라토르란, '만물의 통치자' 또는 '전능자'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은 이콘을 통칭한다. 이 이콘의 가장 특별한 점은 머리 모양, 눈의 크기, 눈썹, 콧수염 등 그리스도의 얼굴이 비대칭으로 그려진 것으로 얼굴 반을 가리고 비교해 보면, 한쪽은 온화하고 다른 쪽은 엄숙해 보이는데,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상징한다. 눈썹 끝이 올라간 왼쪽 얼굴은 거칠고 엄숙한 신적 속성을, 반대편은 온화하고 다가가기 쉬운 그분의 인간성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으로는 축복을 내리는 모습으로, 비잔틴과 정교회 미술에서 표준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자리 잡아 성당의 돔이나 제단에 주로 배치되었다.
판토크라토르 이콘 / 6세기경(좌), 이집트 시나이 성 가타리나 수도원(우)
마치 마징가 Z의 빌런인 아수라 백작(?)을 연상케 하는 위 이콘의 표현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각각의 본성을 합성해 보았으니 두 본성에 따른 차이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시라.
판타크라토르 이콘 합성 이미지, 인간적인 속성(좌) / 신적인 속성(우)
비잔틴 제국은 서유럽과 다르게 황제가 교회의 최고 통치자 역할을 겸직하였다. 특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는 교회법을 제정하고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는 등 교회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였다. 이것은 서유럽 교회와 가장 큰 차이점으로, 당시 비잔틴 제국의 교회 내 벽화에서 성경 속 인물과 함께 황제의 모습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황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신의 선택을 받은 자임을 강조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수행원들(산 비탈레 성당 내 모자이크 벽화) / 6세기
서로마 붕괴 후 서유럽은 비잔틴 제국과 다르게 각 왕국의 혼란과 재편의 과정을 거쳐 8세기에 이르러서야 안정화의 길로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의 역할로 교황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었고 게르만족들이 세운 왕국 전반에 영향을 끼치며 본격적인 중세 봉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