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혈관처럼 좁은 인간관계를 맺고 산다. 관계 편식이 심한 편이다. 반면에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여러 가지 주제를 두고, 각자 생각한 바를 주고받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을 느낀 지 꽤 오래됐다. 돌이켜보니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대화를 편식하는 것 같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편식이 강화되었다. 각자의 사정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이기도 어려웠는데, 그렇게 만든 자리에서 특히 심했다. 한 사람이 시댁, 남편, 육아 이야기를 한 번씩만 해도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맞장구를 치니 동어반복의 대화가 최소 아홉 번 오간다. 또, 명절에는 같은 주제가 다양한 변주를 시작하며 세 사람은 돌림노래 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쩌다 나의 안부를 물어도 내 대답을 듣지는 않았다. ‘보릿자루야, 너 거기 있었네?’ 하는 정도의 인식 과정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오랜만에 만났고, 또 언제 다 같이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서운하기도 했다. 가끔 일대일로 만나거나 통화를 하는 경우에도 패턴은 비슷했다. 주고받을 이야기가 없어지면서 그 친구들이 마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상했다. 한때는 시사 이슈나 가족들의 근황, 드라마나 영화 등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도 토론(?)을 벌였는데. 이제는 시댁, 남편, 아이 이야기를 빼면 관심 있는 분야가 하나도 없는 걸까.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정서를 모르는 걸까.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하는 말은 왜 듣지 않을까. 나의 일상, 내가 재밌게 본 영화나 책, 내가 관심 있게 생각하는 사회적 이슈를 꺼내면 그 주제는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렸다. 처음엔 조금 민망했고, 나중엔 화가 났으며, 지금은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사회생활에서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도 한정적이긴 마찬가지다. 주로 정보를 교류하고, 한 번씩 동료 험담을 하거나 당사자만 비밀로 하는 사내연애, 각자의 신세한탄 정도가 전부다. 대부분 관심 없는 내용이지만 알아두어 나쁠 게 없어서 듣고 있는 편이다. 그러다 작년부터 위기가 찾아왔다. 사람들이 마치 짠 듯이 주식과 부동산 이야기를 꺼냈다. 주식과 부동산 이야기만 꺼냈다. 코로나가 만든 유동자금이 천문학적이다 보니 누구나 관심 있을 만한 주제고 나도 마찬가지지만, 심하다 싶을 만큼 모든 사람이 두 가지 이야기만 했다. 이 주제가 나오면 또 돌림노래를 부른다.
부동산과 주식은 시댁, 남편, 육아의 대화 패턴과 다른 점이 있다. 전자는 은근한 자랑 또는 성토가 목적이라면 후자는 못 가진 쪽이 영문도 모르고 패자가 된다.
-영혼을 끌어서 집을 사야 한다.
-전세 사는 건 바보짓이다.
-그 나이 먹도록 집도 안 사고 여태 뭐 했어.
이런 식으로 이어지면 몹시 불쾌해진다. 끌어 올 영혼이 없다는 내 말은 전혀 듣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이십 년 가까이 성실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 온, 실은 그것마저도 벅찼던 내 삶은 단숨에 평가절하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실질적인 영끌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건 대화가 아니라 알맹이 없는 설교였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대화의 편식을 문제 삼은 게 결국 나의 결핍에서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혼. 육아. 부동산. 주식 등.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흥미가 없는 건 맞다. 또, 저 주제들은 대한민국 성인들 대다수의 현재와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과정이 아쉽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한 사람을 알아가는데 주제도 패턴도 비슷하니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분명히 한때는 빛나는 개인으로 존재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한 덩어리로 느껴진다. 나 역시 그들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에 공감하지 못하고, 주고받을 정보가 없으니 대화 상대에서 배제된다.
요즘 유튜브를 자주 본다. 미술, 영화, 사회 이슈, 동물, 음악 등. 세상의 모든 관심사를 다양한 방법으로 접할 수 있다. 시장에서 물건 구경하듯, 마음에 드는 썸네일을 골라 클릭한다. 영상을 보며 그림을 따라 그리거나, 음악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기도 한다. 대화의 즐거움이 시청의 즐거움으로 바뀐 듯하다. 시청의 즐거움은 일방향이라 생각을 공유하지는 못하지만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창을 닫으면 그 세계도 사라져 버려서 가끔 허무해지기도 한다.
마음의 서랍에 대화거리가 차곡히 쌓여간다. 내년에는 그 서랍을 한 칸씩 열어 누군가와 나누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