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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허 시네마

미키 17 감상평

우리는 모두 "미키"다

by 허지현

인류가 죽음을 극복하면 인간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미키 17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업 실패 후 미키는 친구와 함께 사채업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다른 행성으로 떠나는 우주선에 오른다. 거기서 그는 "익스펜더블"이라는 프로그램에 자원하여 매일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다. 사망할 경우, 당시 저장된 기억과 인격을 기반으로 다시 출력되며, 다시 위험 속으로 던져진다.


마치 자판기로 뽑아내는 일회용 용품처럼 우주선의 사람들은 미키를 우습게 보기 시작한다. 어차피 죽어도 다시 뽑아낼 수 있다는 사실과 자원이 한정된 우주선의 환경 속에서 그의 존엄성은 철저히 짓밟힌다. 인간의 배변과 음식물 쓰레기의 유기물 배합으로 미키는 죽기 위해 다시 태어난다. 고통과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에게 동료들은 해맑게 웃으며 죽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물어본다. 또 치료보단 다시 뽑아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에 그는 버려지거나, 실험을 위해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자신의 상태를 보고하도록 지시받는다. 반복되는 일상의 의미가 퇴색되듯이 언제든지 다시 출력 가능한 미키는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죽이고 다시 뽑으면 그만이야"라는 생각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을 통해 봉 감독은 인간의 존엄성은 물질적이거나 능력의 가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돈도, 지위도, 특별한 자격증이나 능력도 없는 미키는 사실상 누구든지 대체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이다. 그렇다고 그를 착취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겠는가.


사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미키"들이다. 군대에서 제초제보다 사병 월급이 싸기 때문에 병사들을 시켜서 잡초를 뽑는다는 웃픈 얘기를 아시려나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어딘가 이 영화의 배경과 닮아 있다. 조직의 입장에서 그 구성원들은 어차피 소모품들이다. 내보내고 새로운 부품을 끼워버리면 되니까.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노예처럼 부려지는 대학원생, 업계가 좁아 쉽게 직장을 옮길 수 없는 직장인들에게 부여된 과중한 업무나 책임, 쪽방에서 살아가는 돈 없는 노인들 등등... 모든 약자들은 사회적인 큰 단위에서 볼 때 그저 갈아 끼우면 되는 부품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되었을 때 삶이 얼마나 팍팍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의 몸이 자연 치유되어도 손톱을 뽑아내거나 살을 베어내는 것이 아픈 것처럼 다시 살아나도 죽음은 두렵고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어차피 지나가면 괜찮아"라는 말은 앞으로 좀 더 조심스럽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봉준호 감독의 세밀한 설정 디테일들은 이 영화를 더욱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행성 간 송금액 수수료, 지구에서는 금지되었으나 우주에서는 시험적용된 익스펜더블 제도 등은 모두 어딘가 들어본 사례처럼 익숙하다. 게다가 다양한 인물들도 그렇다. 약관을 잘 읽지 않은 채 지원부터 하는 주인공, 와이프의 손에 놀아나고 정치 밖에는 관심 없는 리더, 미키를 출력할 때 핸드폰에 정신 팔려있는 동료, 어떻게든 약삭빠르게 살아남는 미키의 전 동업자 티모 등 모두 우리가 살면서 어딘가 지나친 사람들처럼 입체적이다. 특히 조용한 녀석을 죽이는 것이 탈 없고 편하다는 티모의 대사는 참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약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니 <설국열차>의 크로놀 생각도 났다. 아마도 봉 감독에게 있어 마약과 하층민은 포기할 수 없는 설정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으로 잘 마무리되었고 재밌게 잘 봤지만 역시 기생충 때의 충격이 더 처절하고 강렬했던 것 같다.


P.S. 미키 18은 자폭하기 전에 바라본 미키 17과 나샤가 같이 있는 것을 바라본다. 만약 나샤가 거기 없었더라도 미키는 자기희생을 했을까? 아닐지도 모르겠다.


얼음 행성의 크리퍼는 어딘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벌레와 매머드를 합쳐 놓은 것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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