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4 올림푸스 펄코더 L200

2025년

by 허지현

카세트테이프를 이따금씩 모으다 보니 테이프 자체에 대한 신비한 감정은 희미해진지는 좀 되었다. 그러던 중에 베이비 드라이버라는 영화를 보며 주인공이 쓰는 마이크로 카세트에 흥미를 품게 되었다. 마이크로 카세트는 검지 하나 길이만큼 작은 테이프로, 휴대성이 강해서 옛날의 기자들이 종종 사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에 나온 그 똑같은 모델이 갖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는지 중고 가격이 천정부지였다.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몇 년간 기억 속으로 잊혔었는데, 최근에 유튜브 알고리즘이 베이비 드라이버 클립을 띄워주어 오래간만에 그 기기 생각이 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전보다 가격이 많이 내려가 중고 매물을 하나 주문했다. 도착해서 보니 외부 케이스에 담아 사용해서 그런지 컨디션이 굉장히 좋았다.

아담한 사이즈에 나름 아기자기하게 세심한 기능들이 들어가 있어 감탄스러웠다. 기존에 들어있던 테이프를 재생해 보니, 바다 건너 미국의 어느 옛 회사에서 한 HR회의가 녹음되어 있었다. 전체를 들어보진 않았지만, 고객과 실사용자의 특성을 고려하여 누구를 CEO로 진급시키는 게 바른 전략인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또 중간중간 어느 내비게이션의 광고 소리도 들어가 있고, 어느 소녀가 장난스러운 투로 “밖은 이렇게 화창한데, 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라고 중얼거리는 혼잣말도 녹음되어 있었다.


출처도 알 수 없는 어딘가, 누군가의 일상의 편린이 내 손바닥에 들어있다 생각하니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