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오버핏
스물이 되었을 때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을 어른으로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어감상 스물보다는 서른이 어른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몇 주 전 서른이 된 지금, 이전보다는 어른이 된 느낌이 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데이션으로 변해가는 자신보다는 주변 환경을 보며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부모님이 늙어 가시는 게 보인다. 사회에, 집단에 속하며 나에게 점점 더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그리고 운전도 그럭저럭 할 수 있고 세금과 공과금도 그럭저럭 낼 수 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아직도 자신이 어른이라는 것에는 적응이 되질 않는다. 어쩌면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때 살짝 헐렁한 교복을 사주시며 언젠가는 딱 맞을 것이라 말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갑자기 떠오른다. 어른이 된다는 느낌 또한 무의식적으로 내 몸에 딱 맞을 것이란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어벙하게 졸업해 버린 교복처럼, 어른이 된다는 책임감은 살짝 어벙하고 루즈하게 걸쳐 입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어벙하게, 살짝 삐뚤게 앉아 지금 생활에 대해 적어본다.
커리어
사회가- 조직이- 요구하는 책임은 보통 그 뿌리와 명분은 이해 가능하고 합당해 보이나 그 끝이 다다르는 곳은 전혀 불합리한 경우가 많다. 빛 좋은 개살구라 생각하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년의 커리어의 시점에서 보니 나는 조직보다는 개인을 위해서 행동하고 있었다. 회사의 이익에 혹은 자신의 성과에 이윤창출이 되지 않는다 판단하면 한없이 차갑게 내팽개쳐버리는 행동거지를 보고 있으면 정을 붙이려야 붙일 수가 없다. 자기도 모르는 것을 찾아오지 않으면 뻔뻔하게 화를 내기도 한다. 이런 불합리함을 견뎌낸 오랜 선배들은 잔소리밖에 뱉을 줄 모르고 위안 따위는 다른 데 가서 찾아내야 한다. 애초에 그렇게 버텨낼 수 있는 사람들만 모여있는 곳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이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남처럼 굴 것이면 애초에 친한 척도 하지 않아줬으면 한다. 그들이 살아온 시대와 격변하는 지금의 시대에서 오는 괴리감, 격변하는 사회에서 벌써부터 다가오는 무능력과 무쓸모에 대한 공포,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의 부재, 분리된 노력과 성과의 인과관계 등 많은 것들이 역겹다-고 생각했다.
뻔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생각해 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최근 들어 많이 든다. 어차피 조직은 바뀌지 않고, 늘 무리한 요구를 강요할 것이다. 그리고 내 불손한 태도도 투명하게 그들의 무의식 속으로 각인될 것이다. 혼자 단단해지고 뻔뻔해지는 것 밖에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일상
감정의 농도는 옅어지는데 생활은 고착화된다. 집-회사-집-회사 새로운 곳은 가보기 귀찮다. 예전에는 새로운 영화가 보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아는 영화도 다시 보기가 힘들다. 애초에 활기가 넘치는 편이 아니라 집 밖으로 안 나가게 되니 취직 후 새로운 경험의 수가 극히 제한적이다.
이제 나의 유흥거리는 마치 켜지지 않는 라이터 같다. 스파크만 반짝이고 어딘가로 옮겨 붙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휘발유는 다 써버렸는데 괜히 라이터를 이리저리 흔들어 재끼고 다시 스파크를 튕겨보는 허튼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연료를 다시 채우려는 노력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를까, 너무 귀찮은 걸 어떡하리.
친구들도 점차 두리뭉실 멀어진다. 빛이 프리즘을 통해 여러 파장으로 분산되듯이 한줄기 흰색으로 보이던 나의 또래들도 저마다의 색으로 흩뿌려지고 있다. 다들 그렇게 어딘가로 뻗어나가고 있다.
미래
뭘 해야 하는지는 대충 감이 온다. 회사에서 능력을 열심히 키우고, 돈도 아껴 쓰면서 틈틈이 재테크도 하고 가정에 충실한 모범 시민이 되는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하기 싫고 귀찮은 게 제일 큰 문제다. 그래도 이전만큼 불안하지는 않다. 기억하고 싶은 기억들은 쭉 쓰지는 못해도 트리거 스위치 역할을 할 메모들은 쭉 적어두었다. 우직해져야 하는데, 이게 참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