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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엥 May 07. 2022

자그레브에서 플리트비체

크로아티아 여행, 둘째 날

사실 자그레브에서 묵었던 숙소에 다시 갈 마음이 있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미리 예약해 둔 호스텔을 일정을 이리저리 바꿔보다 확 취소해버렸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5분쯤 뒤에 알았고, 그곳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이 호스텔(HI hostel)이라는 숙소에 머무르게 되었다. 제일 저렴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원래 안기부 청사였던 건물을 일부 그대로 사용했는데, 기숙사도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정말 낡고 스산했다. 그냥 낡은 느낌이 아니라 뭔가 국가의 강력한 체제 같은 것이 느껴지는 고집스럽고 둔탁하고 추운 그런 느낌인데, 이 호스텔 건물도 딱 그런 인상이었다. 헝가리처럼 크로아티아도 공산국가였던가...? 하고 묻게 되는. 지금 찾아보니 구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을 이루었던 공산국가였다네. 


석관동 어딘가를 떠올리게 하는 기숙사 같은 호스텔이라 싫으면서도 익숙해서 마음이 편한 두 가지 감정이 모두 들었다. 체크인할 때 전 세계 모든 하이 호스텔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에 도장을 찍어줬는데 다시 사용할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양치도 못하고 방에 들어가서 바로 잠들었다. 먼저 와 있던 손님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도 안 끄고 자고 있어서 커버에 이불과 베개를 쑥쑥 집어넣고 누웠다. 쿰쿰하게 생긴 호스텔과 달리 침구 커버는 빳빳하고 좋은 냄새가 났으며 조금 따뜻했다. 


4시간 뒤 일어나 다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어두울 때 걸었던 길을 새벽에 다시 걸으니 좋았다. 해가 빨라져 거리는 이미 밝았고 터미널 앞에 있는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는 제렁이를 구경했다. 부다페스트에는 유난히 페이스트리 종류의 빵이 많았는데 이곳도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신기하게 생긴 페이스트리가 여러 종류 있었다. 겹겹이 가볍고 바삭해서 와사삭 바스러지는 페이스트리가 아니라 겹이 갈라져 있기는 한데 어딘가 빡세고 뻑뻑한....결들끼리 사이가 안 좋아서 나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하는 맛. 입에 넣으면 밀가루가 왈랄라 밀려들어 온다. 이것도 개성이려니 하고 먹는다. 


아직 버스 출발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천천히 플리트 비체 행 버스를 찾아서 탔는데, 오버부킹이었다. 

우리 앞에 커플이 갈 곳 잃은 채로 복도에 어정쩡하게 서서 멈춰있고 뒤늦게 뭐지..? 뭐야..? 하면서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다음 승객들이 꽉꽉 버스 복도를 메우고 있는 상태였다. 또 한 번의 괜찮아를 속으로 외치면서 앞에 있던 커플이 이 상황을 알아보고자 버스에서 내리자 버스의 후문, 즉 화장실 앞의 계단을 차지하고 냅다 바닥에 앉아 버렸다. 어차피 의자에 앉을 수 없다면 여기보다 편안한 곳은 없다! 차라리 빨리 단념하는 게 최악을 피하는 거다! 하는 마음으로 비상구에 앉아서 난생처음 보는 눈높이로 창밖을 훔쳐보며 2시간 동안 버스를 탔다. 그 와중에 엎드리거나 기대서 쪽잠도 잤다. 얼굴을 돌리면 우리 근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신발이 코 앞에 있었지만. 대신 내릴 때는 제일 빨리 내릴 수 있었다. 


플리트비체는 국립공원이라 예약을 하고 들어가야 했다. 예약을 하고, 또 변경하느라 허둥댔던 것이 무색하게 입장 체크는 간단했다. 제1입구로 들어가면 호수가 가장 장엄하게 펼쳐진 곳에서부터 코스가 시작된다. 



사실 플리트비체에 흥미가 있었던 건 제렁이였다. 제렁이는 정말 꾸준하게 플리트비체! 플리트비체를 가야 해...! 하고 주장해왔다. 플리트비체는 넓은 국립공원이고, 그 말인즉슨 시골인지라 대중교통편이 좀 까다로웠는데 꼭 가보고 싶다는 말에 열심히 여행 계획을 조율해서 겨우 오게 되었다. 


아마 내가 플리트비체에 크게 흥미가 없었던 건 여행지에 가기 전 사진을 미리 보는 걸 꺼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의 예고편처럼 사진을 봐버리면 실제의 풍경 앞에서 겪어 낼 수 있는 감흥이 조금 덜 할까 봐, 혹은 사진의 아름다움에 실제가 미치지 못해서 실망할까 봐. 그런데 실망한 채로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그곳까지의 여정이 꽤나 비싸고, 오래 걸렸으니까. 제렁이가 무슨 사진과 어떤 이야기를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플리트비체에 도착하는 것에 성공했고,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이곳에 방문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요정이 사는 것 같다더니, 살겠네. 여기서 안 살면 다른 어디서 살겠어, 싶은 곳이었다. 

내가 요정이라도 여기 살겠다 싶은 그런 동네. 


세상천지에 내 몸 하나 뉘일 집 구하는 게 그렇게나 어려우니까 여기 사는 요정들은 정말 선택받은 애들일 거야. 

낡고 후지고 춥지만 귀여운 서울의 내 집을 떠올리면서 장위동 정도의 동네는 요정 나라에서 어디쯤일까 생각했다. 

물과 나무와 물에 들어가서 썩어가는 나무뿐인데 이렇게 예쁠 일인가 하면서 열심히 공원을 돌아다녔다. 

부러져서 물에 잠긴 채로 가지 사이사이마다 물이끼가 도톰하게 끼어있는 나무들은 꼭 살이 다 부스러지고 남은 생선뼈 같아 보였다. 그래서 호수며 웅덩이들은 엄청나게 큰 물고기들의 무덤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물의 색깔이 정말. 

해가 좋아서 그곳에 고여 있는 물이란 물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투명하고 쨍한 에메랄드 색으로 빛났다.

물감이나 RGB의 픽셀로는 도저히 낼 수 없을 게 분명한 생생한 에메랄드 색이었다. 

보석을 갈아 넣거나 독극물을 취급해 가면서까지 색을 만들어 내는데 집착했던 물감 제작자, 화가들이 좌절했을법한. 


세계가 버추얼 한 월드와 메타버스로 이동하고 있다지만 아직도 몸뚱이를 끙끙 들어 올려 무언가를 경험하려 구역 구역 걸어 나가는 일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이런 풍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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