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파리, 낡은 호텔방에서의 첫날

파리의 음산한 날씨와 하찮은 불어실력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by 비터스윗

프랑스 90일 체류는 (당시도) 무비자였다.

3개월 이상 머무를 예정이었던 나는 비자가 필요했다. 파리 3 대학교 입학처에 편지(!)를 보냈고 입학 허가를 받았다.

서류를 들고 대사관에 비자를 받으러 갔다. 비자 업무를 맡고 있는 직원은 불친절, 아니 불친절 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척 쌀쌀맞아서 이미 파리를 경험하는 듯했다. 프랑스 특히 파리인들은 콧대가 높고 현학적이며 외국인에게 불친절하다고 다들 생각하던 때였으니.

나중에 경험한 바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는데 그들의 패션, 말투, 모국어를 고집하는 면모 때문이리라.

항공권을 사고 크고 튼튼한 슈트케이스에 짐을 꾸렸고... 출국 예정일에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부모님은 유학을 가는 것도 아닌데도 무척 고무됐고 잘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난 파리지엔처럼 쿨하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드디어 파리, 카르티에라탱의 엘베 없는 5층 호텔


10월 중순이라 비수기였던 이유도 있지만 당시는 양국 간에 교류가 많지 않았고 관광객도 많지 않던 시절이다. 출장을 가는 회사원들, 나 같은 어학연수생들, 일부 프랑스인들이 속속 자석을 채웠다. 빈 좌석이 많아서 갈색 머리의 프랑스 여인이 중간 좌석열의 세 좌석 정도를 차지하고 자던 모습이 떠오른다.


창가 쪽에 앉았다. 중간 좌석은 비어있었고 통로 쪽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듯한 한국 남성이 앉아있었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됐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륙 위를 비행하고 있을 때쯤 그가 말을 걸어왔다. 공부하러 가는지, 처음 파리 방문인지를 물었다. 그리고 자기소개를 했다. 당시는 승승장구하던 대우전자 직원이란다.

평소 누가 말을 걸어오면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는 편이 아닌데 한국인인 데다가 파리 경험자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도착 때까지 대화를 계속했다. 정확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헤어지면서 연락처를 교환하지는 않았고 (나의 연락처는 당연히 없었다!) 그의 명함은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샤를르 드 골 공항에는 지인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사실 초면이었고 몇 단계를 거쳐서 연락을 드린 분이었다. 나는 당분간 그분의 집에서 머무를 것으로 예상했었다. 일주일은 신세를 지다가 방이나 집을 얻어서 나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나를 파리 시내 허름한 호텔 앞에 내려주고 가셨다.

부인이 최근 출산했는데 장모님까지 와계셔서 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아주 가까운 관계도 아니라 더 이상 요구하기도 힘들었다.


소르본 대학교가 있는 카르티에라탱 지역의 어느 호텔 꼭대기 방.

시차 때문에 잠은 오지 않았고 대학가여서 새벽까지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염없이 발코니에 기대어 파리 풍경을 눈에 담았다. 가을밤의 습하고 차디찬 공기가 느껴졌다. 습기를 머금은 파리는 우리나라 가을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고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새벽부터 청소차들의 소음으로 파리의 회색 건물들은 조금씩 잠에서 깨고 있었다.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은 나는 바게트를 사러 나갔다. 새벽부터 바게트를 굽는다더니 정말 7시쯤 되니 사람들이 줄지어 빵집에 들어가고 있었다.


"바게뜨 씰 부 쁠레." Une baguette s'il vous plaît." (바게트 하나 주세요)

근처 가게에서 물과 바나나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드디어 바게트를 먹고 에비앙을 마셨다.

파리에서의 이틀째 날이 밝았다. 벌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머무를 곳을 구해야 했다.

나의 플랜 B를 가동할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전해준 편지를 들고 A선생님을 찾아갔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니라 아버지 직장 동료인 B선생님이 써준 소개장이었다. 아버지가 걱정을 됐던지 아는 분을 수소문했고 마침 B 선생님의 선배가 파리에 있는 걸 알게 됐던 것. B선생님이 친필로 써준 부탁의 편지를 들고 A선생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파리 가기 전 언론계에 있던 그분은 파리에서 한인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고 부인은 유명한 한식당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먼저 했었는지 무작정 찾아갔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가을비를 맞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파리 한인 신문 벼룩시장을 보고 방을 얻다


부인께서 반갑게 맞아 주었고(사실 반가웠을 리는 없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불청객들이 찾아왔겠는가!) 선생님은 오는 중이니 먼저 식사를 하라고 따끈한 한식을 내어주었다. 사실 파리에 온 지 며칠 안 됐었지만 마음고생을 해서인지 눈물이 핑돌만큼 맛있었다.

그 식당은 당시 많은 한인들에게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그날 저녁 유명한 재불 여류화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70대 여성화가가 50대의 멋진 프랑스 남성과 함께 식사를 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잠시 후 선생님이 오셨고 내가 건네드린 편지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걱정 말라하시면서 한인 신문에 방을 세 놓는 광고가 많으니 그중에 하나를 골라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고 호텔에서 나와서 일단은 본인 집에서 하루 이틀 머무르라고 했다.


파리 가정집 방문은 처음이었다. 역시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였고 두 자녀가 있었다. 방과 거실이 비슷한 면적으로 붙어있는 구조였다.

다음 날 아침 부인께서 바게트와 잼과 버터를 내어주셨다. 직접 내리신 커피를 큰 보울(대접)에 따라주신 기억도 난다. 프렌치 보울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릇이 그때는 무척 생소했다.

광고를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다. 학교까지 교외선 기차(RER)를 타면 되는 곳이었다. 선생님과 함께 먼저 집을 둘러보았다. 아파트는 아니고 방이 서너 개 되는 작은 집이었다. 파리 시내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초조했던 탓인지 성급하게 결정해 버렸다. 거리가 다소 멀어 나중에는 후회하게 됐지만.

다음 날 아침 가방을 챙겨서 새 집으로 향했다. 부부 모두 출근하신 뒤라 혼자 가겠다고 한 터였다.

떠나면서 아이들에게 뭔가 한마디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마디 한 것이...

지금도 생각하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다.


"Obéissez à vos parents."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갑자기?'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흐브와..." 하면서 황급히 떠났다.


유학생 신혼부부 집에서 난생처음 자취생활 시작


방을 얻은 곳은 서울로 치면 성남시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슈와지 르 르와(Choisy Le Roi)였고 한적한 파리 교외로 고급 주택들이 즐비했다.

대체로 중년 부부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내가 살게 된 곳은 고급 주택은 아니었지만 내부는 그런대로 깔끔했다. 여분의 방이 더 있었지만 당시 자취하는 사람은 나뿐이어서 욕실은 나 혼자 사용했다. 주인 부부는 신혼부부였고 남편이 유학생이었다.


책상과 침대는 갖춰져 있었고 A선생님이 주신 TV를 놓았다. 이것저것 살 것도 많은데 일단 집을 풀고 당시 유학 중이셨던 선배님을 뵈러 갔다. 파리에서 중국음식으로 저녁을 얻어먹고 작은 전기 플레이트를 얻었다. 요긴하게 쓸 거라고 하셨다. 1구짜리 핫 플레이트 하나로 나중에 라면도 끓여 먹고 김치찌개도 해 먹었다.

전화는 따로 써야 된다고 해서 집 전화를 설치했다. 짧은 체류여서 계좌까지 굳이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방을 좀 꾸며볼까... 침대시트 등 살 것이 많아서 여주인이 알려준 유로마르셰로 향했다. 좀 멀지만 걸어갈 만한 거리라고 했다.

유로마르셰(Euromarché)는 지금은 사라진 대형마트 체인으로 그렇게 큰 외국 마트는 처음이었다. 백화점이 아닌 마트에서 다양한 상품을 파는 모습이 신기했다. 식료품에 의류, 인테리어 소품들, 전자레인지도 있었다. 대우전자 전자레인지가 잘 팔린다고 했다.


집은 구했고 마트도 찾았으니 먹고 살 준비는 됐고 이제 학교를 가야 했다. 학교 어학원에 가서 등록을 하고 레벨 테스트를 거친 뒤 클래스 배정을 받아야 했다.

패션의 도시 파리, 예술의 도시 파리... 그야말로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곳임이 실감이 났다. 국적도 스타일도 외모도 정말 다채로웠다.

잠깐만, 그런데 다들 불어를 잘하네? 아니 초급자들이 오는 곳이 아닌가?


테스트를 받기 전부터 나는 얼어있었고 겨우 테스트를 받고 반이 배정됐다. 불어를 잘하면서 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처럼 비자를 받기 위해 이 학교를 선택한 학생들이 많았다. 사설학원이 아닌 국립 대학교여서 비용이 저렴했던 것이다.

패션, 요리, 미술, 메이크업 등을 배우러 온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공부를 하게 됐다.


파리 입성 까지는 성공적이었는데 언어가 문제였다. 실패라곤 해본 적 없던 내가 처음으로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용기가 있었던가, 그러나 얼마나 또 실망했던가.


Quel dommage! (안타까워라!)


파리의 음산한 날씨와 더불어 한없이 위축된 나의 파리 생활이 시작됐다.


(유명 장소나 고유명사 등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외래어 표기를 우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