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도 '사회'임을 몰랐던 맹꽁이

by 비터스윗

80년대는 경제 호황기였다고 한다. 비정상적인 경로로 권력을 쥔 정권이었으나 경제는 성과를 냈다고 한다.

대내외적으로 여러 여건들이 잘 맞아떨어졌던 모양이다. 국내 경제는 3低 (저금리·저유가·저환율)를 바탕으로 성장세를 나타냈고 성장과 함께 물가안정도 이루었지만 이는 공권력으로 노동자를 탄압했던 결과라는 시각도 있다.

다시 말하면 임금 상승을 억제해서 물가를 관리했다는 것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에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했으나 노동자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업이 성장하면서 고용시장에는 훈풍이 불었던 시절이다.

문과생 최고의 직장은 역시 대기업

상위권 대학 졸업자들은 대부분 취업이 잘됐다. 다들 대기업을 선호했다.

당시는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이 주요 대학교를 돌아다니며 취업설명회를 열었고 졸업예정인 우수한 인재들을 미리 입사시키기도 했다.

선배들과 동기들은 대기업인 삼성, 현대 그때만 해도 위용을 날리던 대우, 럭키금성(현 LG), 두산, 선경 (현 SK), 쌍용, 효성, 코오롱 등에 입사했다. 물론 그때도 학점은 중요했다.

운동권에 몸담았다가 수감됐었거나 혹은 학사 경고 등을 받았던 이들은 취업이 쉽지 않았다.

그런 선배들은 창업을 하거나 학원을 차리기도 했다.


남자 친구는 대기업 아닌 다른 곳에 입사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건 부모님도 알고 계셨다. 하지만 '만나다 말겠지'라고 생각하셨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다.

시대적으로 그런 분위기였던지, 내가 소심하거나 게을렀던지, 아니면 운명이라고 그럴싸하게 잘 포장했었는지 모르지만 난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을 올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고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대학원 진학이라는 그럴싸한 대안을 부모님께 제시했다.

부모님은 그만큼의 유예 기간 동안 좋은 신랑감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딸이 이제는 대학원까지 가겠다고 한다며 교수가 꿈이었는지는 몰랐다고 주변에 으스댔을지, 연애는 하는 것 같은데 결혼까지 할지는 모르겠다고 둘러댔을지 모르겠다.


나는 흔들리지 않았고 흔들릴 생각이 없었고 내가 흔들릴만한 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를 거듭하며 이어진 연애, 결말은 이미 정해졌다.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 반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끔 상상해 볼 뿐이다.

내 또래 기혼자들 대부분은 드라마틱하지 않은 진부한 스토리들을 간직하고 있다.


한 친구의 말에 공감한 적이 있다.

"있잖아. 우리 때는 그냥 결혼 적령기 때 만나던 이성이랑 결혼한 거 같아.

어릴 때 만났거나 군대나 유학 등으로 헤어져서 결혼까지 이어지지 않은 커플들도 있긴 하지만."

연애=결혼이라는 공식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던 여성들이 대다수였다.


대학원, 어쩌면 처음 경험하는 사회생활


지난 화에서 밝힌 대로 대학원 경쟁률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경쟁률이 낮다고 쉬울 리는 없다. 실력이 비등하기 때문에 더 힘든 시험이었다.

실제 합격한 외부 대학생은 한 학년에 한 두 명 정도였다. 내가 입학할 때는 약 다섯 명 정도의 타대생이 지원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졸업 후 4년 만에 또다시 입학시험 준비다. 5시에 집에서 출발, 6시에 도서관 개관 시간에 맞춰 등교, 남자 친구 자리를 맡아 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혹자들은 공부가 제일 쉽다고들 한다.

나는 공부를 필요에 따라 해왔을 뿐이다. 특히 시험공부는 그렇다. 무언가를 알고자 배우고자 하는 호기심은 지금도 강한 편이지만 공부를 재밌다고 생각하며 한 적이 과연 있었는지 모르겠다.

공부는 합격, 통과 등의 보상이 따라와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몇 개월 치열하게 공부한 결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합격을 했다. 떨어진 동기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음 해에 다시 시험을 봤다.


열 명 남짓 대학원생들과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님들과도 조금 가까워졌다. 학부 때는 경외심으로 우러러보며 눈도 못 마주치던 교수님들이었는데 말이다.

한 교수님은 교단이 아닌 강의실 책상에 앉으셔서 함께 토론을 하는 수업을 진행하셨다. 굉장히 밀착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수인 데다가 한 연구실에서 복작복작 생활하다 보니 소문 같은 것은 급속도로 퍼졌고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주목을 받았다.


대학원생들은 대부분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학구파들이어서 정치상황이나 노동 현장의 현실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기억나기로는 대학원 첫 학기 엠티에서 당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혼자 흥분하다가 흐지부지 됐지만 말이다. 여전히 난 형들과 오빠들 사이에서 갈등 중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대학원의 환경과 역학관계(?)적응해야만 했다. 박사 과정 선배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교수님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어야 했다. 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곳이 아니었다. 내 인생 최초의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지성의 완성인 교수님들, 그리고 견고한 그들의 권위


교수가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의 전공학과는 법학과나 경제학과처럼 전국 대학교에 다 개설돼 있는 필수 학과도 아니었고 사립대나 지방대는 그 당시에도 본교 출신을 임용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얼마 안 되는 교수직을 놓고 열심히 경쟁해야 하는 것이었다.

대학원에 적응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유학 가는 선배들 얘기부터 장차 임용될 예정인 선배들 얘기까지. 임용이 안돼 밀려있는 박사과정 선배들도 있었고 용케 타 국립대학에 임용된 선배들 소식도 들었다.

훌륭한 논문을 써야 하는 건 당연했고 더불어 교수님들을 잘 보필해야 했다. 교수님들의 출장과 학회 참석에 동행하거나 평소에도 늘 가까이에서 맴도는 선배들은 이미 후임 교수로 내정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편에는 교수님들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존재감을 유지 중인 남자선배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석사과정 중에 결혼을 하는 여자선배들이 있었다. 결혼한 선배언니들은 가끔 연구실에 나와서 행복한 신혼생활 얘기를 풀어놓았다.


훗날 그때 그 '존재감 있는 남자선배들'이 대부분 임용이 된 걸 보면, 그 당시 '성별'이 여러 고려사항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

교수님들 사이에서 여자 대학원생들은 결혼 후 공부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는 선입견이 팽배했음에도 그런 선입견에 맞설만한 근성 있는 이들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교수님 연구실에 자주 찾아가지도 않고 논문 주제에 대해 많은 고민도 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 시간들을 허송세월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비판만 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인 대학원 생활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자연스레 고민이 시작됐다.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으로 바로 올라갈까, 아니면 유학을 갈까, 결혼을 해버릴까.

고민만 하면서 논문 준비에는 도통 신경을 쓰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됐을 리가 없다.

석사 논문은 통과되지 않았다. 완성도가 지극히 떨어지는 논문이었다. 대체로 첫 번째 제출해서 통과되기가 쉽지는 않지만 무척 속상했다.

오히려 잘됐다. 어차피 한 학기는 기다려야 했다. 이 참에 꿈꾸던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스물네 번째 생일이 지난 지 열흘 후

나의 꿈의 도시 파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