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도 운동권도 회색분자도 아닌
386,486,586... 요즘은 그냥 '86'으로 부르는 그 유명한 386 운동권. 지금 60대가 30대였을 때 생겨난 말이니 벌써 30년 됐다.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으로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주축을 이뤘던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당시 운동권에서 자주 쓰던 말 중에 'RP'라는 말이 있다. 'RP'란 'reproduction'의 줄임말로 생식, 재생산, 복제 등의 의미를 갖는 단어.
기업이나 조직에는 언제든지 실력 있는 인재들이 영입돼야 한다. 운동권 역시 그런 의미에서 RP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처음부터 똘똘한 녀석들을 데려오고 싶었겠지만 입신양명을 꿈꾸며 들어온 서울대생들이 쉽게 발을 들여놓기는 힘든 곳이었다.
꿈도 고민도 없었다고는 했지만 나 역시 그렇다고 나와 결이 달라 보이는 선배들, 동기들에게 쉽게 동질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빠른 친구들은 이미 신입생 환영회 때 이미 동문 선배나 동향 선배들로부터 포섭(?)을 당해서 이미 사회과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5화에서 밝힌 대로 선배들은 나를 RP상비군(?)쯤으로 봤을 것이고 계속해서 점심과 자판기 커피를 사주며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 결과 1학년 2학기 종강 이후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이른바 의식화된 것이다.
어느 발라드 가사처럼 "예전만큼 웃질 않고 좀 야위"어 갔다. 강남역에 나가는 횟수도 줄었다.
3S.
전두환 정권의 대표 정책으로 불리는 3S 정책. 스포츠, 스크린, 섹스.
이전 정권의 규제, 검열이 전격적으로 폐지되고 때마침 경제 호황과 함께 국민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상을 만끽했다. 어찌 보면 눈 감고 귀 닫고 하고 싶은 말만 참고 살면 행복하게 살았을 80년대였다.
이미 남학생들은 장발로 자유를 만끽했고 여학생들도 개성 있는 패션과 화려한 화장을 뽐냈으며 자유로운 이성 교제는 대학생과 청년들의 특권 같았다.
흥청망청 분위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해외 식음료 프랜차이즈의 상륙이다. 피자헛, 도미노피자 등 미국계 피자 브랜드가 1980~90년대 초중반에,
맥도널드는 1988년에 현재 갤러리아 백화점 건너편 압구정동에 1호점을 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80년대, 앨범마다 건전가요를 수록하던 시절에 크게 히트한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은 군사정권에 항거하던 젊은 층들의 조롱거리였다.
“하늘엔 최루탄이 터지고/ 강물엔 공장폐수 흐르고/ 저마다 누려야 할 권리가/ 언제나 짓밟히는 곳”으로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https://www.khan.co.kr/article/202209050300035 )
젊은이들은 이 좋은 나라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먹고 마시며 즐기면 되는 것이다.
공연히 거리로 나오지 말고 이상한 선배 만나지 말고 이상한 불온서적 읽지 말고 사회에 불만 갖지 말고 잘 살고 있는 노동자들 꼬드기지 말고.
정의나 진리냐 연대감이냐 노동자의 권리냐... 그런 이슈를 여기서 다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90, 91학번 까지는 대학 생활 중 늘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나의 캠퍼스 시절 중에는 수업 거부가 가장 민감한 이슈였다.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친구들은 완강했고 수업을 거부해야 한다는 친구들도 물러서지 않았지만 결국은 각자의 선택을 존중했다. 수업을 듣겠다는 친구들은 강의실로, 수업을 거부한 친구들은 스크럼을 짜고 거리로 나갔다.
나는 수업을 거부하는 쪽을 택했다. 아크로 집회에 나갔고 드물었지만 거리 투쟁에도 나갔다. 달리기를 못하는 나는 뒤쪽에서 주춤거리다가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운동권처럼 안보이려고 구두를 신고 나가기도 했다.
그전까지 나는 당시 여느 여대생들하고 다르지 않았다. 그저 대학 생활 잘하다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예상을 했을 것이다. 서울대 여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동기들 중에도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한 친구는 십여 명 중에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직장생활 또는 프리랜서로 일한 친구들이 반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캠퍼스 생활이 싫다거나 전공 수업을 등한시 한건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수업 거부를 하고 엉뚱한(?) 사회과학 수업을 들으면서 학점도 초라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캐릭터는 유지가 됐는지 전술한 대로 운동권 형들과 마이카 오빠들 사이에서 학사주점과 생맥주 집을 오가며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다. 나의 패션 역시 전형적인 운동권 여학생의 옷차림이 아닌 웨이브 헤어스타일, 완벽한(?) 메이크업에 가끔 하이힐을 신었으며 가방은 당시 유행한 아트 박스 백팩을 메고 다녔다.
어느 날 "ㅇㅇ선배가 너 찾더라."는 말에 과사무실로 갔다. 그 ㅇㅇ 형은 갑자기 내 소맷부리를 잡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다른 과사무실이었었는지, 빈 강의실이었는지 어쨌든.
"가방 열어봐." "네?"
큰 메가폰을 넣는다. 가방이 커서 공간은 넉넉했다.
"이거 메고 교문 통과해서 ㅇㅇ로 와라." "걸리면 어떡해요?" "야, 너 안 걸려."
당시 교문에서는 경찰들이 학생들의 가방을 수색하던 시절이다. 화려해 보이는 여학생의 가방에 메가폰이 있다고 누가 상상하겠는가.
한 번은 몰로토프 칵테일, 즉 화염병을 대여섯 병씩 옮기기도 했다. 당시는 과사무실이나 서클 룸이 무단으로 수색당하던 시기였다. 과사무실에 메가폰이나 불온 유인물 등을 숨겨놓곤 했는데 그게 발각되면 주동자를 찍어서 잡아넣으려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런 일을 서너 번 했다. 지금도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에피소드들이다.
하나 더 있다. 형사가 집으로 찾아왔던 일.
선배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그 선배 수첩에 기록된 후배인 나의 집에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 나는 집에 없었고 집에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셨다. 아주머니 말로는 내 책상을 다 뒤집어엎더니 거실에 잠시 앉아 있다 갔다는데 아마도 사는 곳이나 아버지 직업 등을 고려해서 더 이상은 수색이나 조사는 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8 학군 여학생이라는 선입견 덕을 본 셈이라고나 할까.
투사는 절대 아니고 운동권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몇 년 간의 대학 생활...
어쨌든 나의 스탠스(stance)가 애매모호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는 절대 회색분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약간 '리버럴한 사회주의자'인 8 학군 여자애, 걔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진로를 고민하게 되고 없던 꿈도 다시 꾸어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공장에 취업한 선배들이 몇 명 있었지만 대부분은 취업을 준비하며 학점관리에 들어갔다.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연애 상대는 같은 학교 학생이며 그는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연히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였고 그렇다면 대학 졸업 후의 플랜을 짜야했다.
갑자기 대학원을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입시 전만 해도 아니 시험 본 직후에도 고려한 적 없던 전공인데 말이다. 어쨌든 다수의 선배 언니들도 대학원 진학을 꿈꿨고 동기들 중에도 2분의 1 정도는 대학원 진학을 원했다.
학점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교수들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고 '시험 운이 강하다'라고 생각하던 나는 도전해 보고 싶었다. 집에서는 찬성하셨다. 큰 딸이 교수가 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셨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교수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남자 친구가 취업 준비 기간 중이어서 시간을 좀 벌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데 말이다.
어쨌든 나는 대학원에 합격했다.
뭐 이리 쉽게?
아니다. 아주 힘들었다.
경쟁률은 1.2대 : 1이었던가. 하지만 타 대학생은 거의 없었고 우리끼리 경쟁하는 시험이라 정말 치열했다. 과장해서 고 3 때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이 치열함 역시 2010년 공인 중개사 시험 때 갱신된다)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문우답을 하자면, 사실 우리 모두는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지 않는가.
그렇게 살아왔고 또 살아가게 된다. 내가 그랬다.
대학원은 내가 꿈꾸던 곳이 아니었다.
나의 사회생활이 시작된 곳, 경쟁과 차별과 아부를 경험하게 된 곳이었다.
(다음 화는 2월 8일 발행 예정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