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원 없이 하면서도 마음 편치 않던 시절
20대. 얼마나 싱그러운 나이인가.
과사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는 뿔테 안경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학생들, 수수한 단발머리에 옅은 화장을 한 여학생들로 분주하다.
진리는 나의 빛일지 진리가 나의 발목을 잡을지 아직은 알지 못하는 풋풋한 새내기들의 관심사는 이성 교제. 당시는 대부분 남고, 여고를 졸업했던 까닭에 치열한 입시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전리품(합격증)을 거머쥔 신입생들의 당면과제는 이성을 사귀는 것이었다.
하루는 동그란 얼굴의 친구 J가 헐레벌떡 강의실에 들어섰다. 얼굴이 발그레하길래 물어보니 교문에서부터 남학생이 따라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런 일은 나에게는 왜 일어나지 않는지 질투가 났다.
이성을 사귀려면 우선 많이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고등학교 때도 이성교제를 했다지만, 고 2 겨울방학 때부터 독서실을 다니면서 눈인사만 하던 남학생들 말고는 남자 친구라고 할 만한 이성을 만난 적이 없었다.
다행히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연락이 왔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소개팅은 다양하게 들어왔다. 대부분은 같은 관악 캠퍼스 1학년 생들이었다.
같은 과 남학생이 고등학교 동창을 소개해주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고등학교 선배 언니가 같은 과 선배 오빠를 소개해준다고 나오라고 한 적도 있었으며, 같은 과 남학생이 자기 고등학교 동창들과 우리 과 퀸카(?) 두세 명의 미팅을 주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단 주선자가 서울대 생이면 나오는 사람도 서울대 생. 서울대 여학생은 서울대 남학생을 만나는 게 편한 것 같았다. 간혹 다른 학교 신입생들도 만났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만남이 오래가지 못했다.
반면 같은 과 남학생들은 오전에 전공 수업이 끝나자마자 무작정 E여대가 있는 신촌으로 향했다.
같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단체 미팅을 나가거나 서로 소개팅을 시켜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더욱 적극적으로는 E여대와 연합 서클을 만들어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서울의 대학생들에게 E여대는 그야말로 로망이고 파라다이스였다.
소개팅이나 미팅 외에도 방학 때 콘도미니엄이나 스키장에서 즉석 미팅을 해서 결혼까지 골인한 경우도 주변에서 목격했다. 아무래도 집안이 좀 부유한 대학생들의 경우일 것이다.
이쯤 되면 서울대 여학생보다 서울대 남학생이 훨씬 더 인기가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것이다.
사실은 맞다.
흔히 그런 말 하지 않나.
여성이 서울대 들어오려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겠느냐는 둥. ('독하다')
공부에 인생을 걸어야 할 어떤 이유가 있는 여성들일 거라는 둥.('꿈이 원대하다')
공부 잘한 여성들이 얼굴까지 예쁘겠냐는 둥.
('외모에 대한 선입견')
어쨌든 그래서인지 같은 과 여성 선배들을 봐도 캠퍼스에서 짝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캠퍼스 커플, 과 커플이 적지 않았다.
주로 여성 비율이 높은 인문대, 사범대에 특히 과 커플이 많았다.
소개팅남들 중에는 미국 유학 중이던 중견기업 2세도 있었다. 자가용을 타고 온 사립대생도 있었다. 서울대생들로는 의대생, 치대생, 공대생 등 다양한 전공의 남학생들을 만났다.
하지만 연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중견기업 2세인 유학생의 경우 내게 적극적으로 대시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유학생 신분이었던 것이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느 날 친구가 어떤 서클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친목 모임의 서클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교내 합창반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학과 내에서는 사회과학 공부를 하는 서클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 말고는 일주일에 이삼일은 강남역 디스코텍에 출석하던 시절.
굳이 또 그런 서클이 필요한가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가 권했던 서클은 상류층 자제들만 가입하는 서클이었다. 초기에는 경기고등학교, 경기여고 등 명문 고등학교 출신 대학생로 출발했었다는데 훗날 서울대와 이화여대 재학생들 중 집안이 좋은 학생들의 모임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추천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으며 부모님이 재계, 법조계, 정관계의 자제들로 구성됐다고 한다.
그 친구에게 생각 좀 해보겠다고 말했었는데 웬일인지 그 후에 내게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8 학군 출신에 경제적으로는 여유 있어 보였으나 정, 재계와는 무관한 집안이어서 아마도 다시 묻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 그 서클 회원들끼리 결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그 서클이 내게는 계층 상승을 도와줄 좋은(?) 기회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절대로 넘볼만한 만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외모는 평범했던 중견기업 2세 소개팅남과 맺어지지 못한 것... 친구가 소개한 서클에 제발 가입시켜 달라고 조르지 않은 것...
계층 상승을 도와줄 사다리를 내가 걷어찬 것인지 아니면 사다리를 오르다 주저앉은 것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나의 성격과 기질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강남 출신 신입생들을 학교에서는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부르주아의 기원을 생각하면 맞지 않는 말이지만 그때는 계급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던 때였고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등 계급론을 주야장천 떠들던 때였다.
부르주아, 다른 말로 하면 있는 집 자식들일 텐데 물론 멀끔한 겉모습에 이미 자차를 소유했던 일부 학생들도 있었지만 당시 서울대에는 형편이 넉넉지 않은 학생들이 더 많았다. 비교적 부담이 적은 국립대학교 등록금을 버겁게 느낀 친구들도 있었다.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특히 우리 학과 남학생들은 2 지망으로 들어온 경우가 많았고 평범한 집안의 지방 출신도 많았는데 여학생들은 다들 집안이 좋고 실제로 사업가 집안인 부르주아 자제들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여성들의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아서였을까.
우리 집은 평범한 중산층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에서 기자인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아서였는지 입학 후 선배들과의 대화에서도 나는 상당히 반골 기질을 보였었다. 시사에 민감했고 자기주장이 뚜렷했다.
언젠가부터 선배들은 점심때만 되면 밥을 사주고 자판기 커피를 사주며 나에 대해 탐문하기 시작했다.
늘 긴가민가 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화려하고 발랄했으나 말을 걸어보면 뭔가 발전(?)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그런 신입생이었던 것이다.
넉넉지 않은 본가에서 보내준 용돈을 쪼개어 학생식당 밥을 사주던 오빠들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운동권 오빠들이다. (이후 형이라 부르게 된 오빠들)
지금은 변호사, 사업체 대표, 기자 등으로 시대의 격랑을 헤쳐 나온 선배들.
난 그들이 건네준 책이나 복사물을 읽으며 함께 토론했고 서서히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다. 형들을 따라 학교 앞 주점에 가면 술자리는 늘 대성통곡 아니면 분노로 끝나기 일쑤였다. 왜 그렇게 선배들은 속상한 일이 많은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있는 집 선배들과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말랑말랑한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2학년이 가까워 오자 점점 소개팅에도 심드렁해졌으며 고민이 없었던 신입생은 고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가장 원초적인 고민이자 가장 실존적인 고민.
어떻게 살 것인가.
밥 잘 사주던 선배들은 상아탑 밖으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음 화는 25일 발행 예정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