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게 디스코텍 드나들던 시절
나만 시험이 어려웠던 건 아니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눈물바다였다. 작년 시험보다 훨씬 어렵다고들 했다.
300점 (당시 만점은 340점) 이상을 예상했던 상위권 친구들도 10점 이상씩 점수가 떨어졌다며 불안해했다.
나도 예상 점수에 못 미쳤다. 국어가 조금 어려웠고, 영어는 어려웠으나 잘 본 편이었고, 수학은 이미 수포자여서 몇 개는 찍을 정도였는데 두어 개 정도 더 맞는 행운도 따랐다.
교무실에 대학별 합격 커트라인이 예측된 배치표가 도착했다.
모교 J 여고는 1977년에 개교한 신흥 사립여고였다.
학교에서는 어떻게든 명문대에 많이 합격시키고자 전략을 짰다. 서울대, 연대, 고대, 서강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학과는 고려사항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반 1등이자 문과 1등인 친구는 서울대학교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간다고 했다. 그 친구는 일찌감치 사범대를 지망했었다. 당시 여학생들은 어문 계열, 사범대, 가정대 등으로 진로를 희망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선생님은 종로학원에서 만든 (것으로 기억되는) 배치표를 펼쳤다. 서울대 영문과는 좀 어렵다고 했다. 사범대는 해볼 만했고, 사회과학대 중에서는 정치, 외교, 경제학과는 어렵다고 했다.
"연세대 영문과는요?"
"될 거 같은데. 왜?'
학교와 집에선 서울대학교를 가길 원했다. 명문대, 특히 서울대학교를 몇 명 보내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다.
부모님으로 말하면 서울대학교를 나오신 아버지의 대를 잇는 것이었고 엄마는 좌고우면을 용납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으면 들어가는 거였다.
서울대학교... 고리타분한 공붓벌레들, 전국의 전교 1등, 요즘으로 치면 너드(nerd : 괴짜, 일명 공부만 잘하는 사회성 부족한 사람)들이 오는 학교. 재미없는 게 뻔했다.
왠지 개방적이고 멋 좀 부리는 아이들이 많을 것 같은 연세대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고민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결국 내가 꿈꿔 본 적 없었던 ㅇㅇ학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의 한 학과에 지원했고 합격을 통보받았다.
당시 J여고에서는 서울대학교에 13명 내외의 재학생을 합격시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말하는 대로 / 될 수 있다곤 / 믿지 않았지
마음먹은 대로 / 생각한 대로 / 할 수 있단 건
거짓말 같았지 / 고개를 저었지
(말하는대로, 처진 달팽이)
12년의 초중고 시절 동안 공부와 시험에 전심전력한 결과.
결코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던 서울대학교 학생이 되다.
내 인생에서 '자기 효능감'을 처음 맛본 때라고 해야 할까. 내 능력을 검증받았고 결과가 나왔으니 말이다.
여기 더해 나의 미션을 성공적으로 이뤘다는 성취감도 달콤했다. 성취감은 최고조였고 그 성취감으로 도파민 역시 인생 최고로 뿜어져 나왔다. 그랬다 정말.
(그 후로는 큰 아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다시 한번 느꼈던 거 같다. 역시 대한민국은 학벌이 도파민인가.)
입학 전에는 공붓벌레들, 공부밖에 모르는 바보들 일거라고 무시했던 신입생들이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도 말끔히 들 차려입고 검정이나 감색의 대학생 가방 (비닐 소재로 당시 남학생들이 들고 다닌 가방이 있었음)을 들고 전국에서 속속 모여들었다.
지극히 평범한 외모의 아이들이었지만 다들 얼굴은 상기되고 눈빛은 초롱초롱했으며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전국에서 공부 제일 잘한다는 애들이 모인 대학교 아닌가. 나의 자부심 역시 남들 못지않았으며 캠퍼스에서 선후배들, 동기들을 보면서 소속감과 일체감도 강해졌다.
TMI로 'Veritas Lux Mea' (베리타스 룩스 메아 : 진리는 나의 빛)는 서울대학교의 교훈이다. 초대 총장이 만들었다고 한다. 하버드대학교의 ‘베리타스(진리)’와 옥스퍼드 대학교의 ‘도미누스 일루미나치오 메아 (Dominus illuminatio mea : 주님은 나의 빛)’를 적절히 섞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큰 딸이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와락 안아주시며 환하게 웃으시던 얼굴이다.
그만큼 나의 합격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모멘트'였다.
한껏 '후카시'(?)넣은 (부풀린, 힘을 준) 사자머리 헤어스타일. 짧은 데님 스커트. 이대 앞 구두 살롱에서 산 7cm 에나멜 하이힐. 그것도 빨간색. 아마도 캠퍼스에서 눈에 띄는 옷차림이었을 것이다.
긴 파마머리에 성숙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니 간혹 재수했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강의실로 가는 길목은 인문대학과 음대, 미대가 가까이 있어서 자연대나 공대보다는 여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는 구역이다.
대학 본부와 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 광장을 '아크로 폴리스' 광장이라 부른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 언덕인 '아크로폴리스'에서 이름을 따왔다. 줄여서 '아크로'로 불렀고 관악캠퍼스에서는 가장 중요하며 유명한 장소로 수많은 시국 선언, 집회가 열렸던 곳이며 1980~9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최루탄 냄새가 여러 달 동안 떠나지 않던 공간이기도 했다.
남녀공학이라 해도 서울대학교 재학 중인 여학생의 비율은 낮아서 여학생들이 많은 인문대나 사대 등에 다니는 남학생들은 다른 과 친구들로부터 소개팅을 시켜달라는 요청에 시달리기도 했다.
재학생들의 출신지는 전국적으로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역시 8 학군 출신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8 학군 학교로 남고는 휘문, 경기, 영동, 서울 고등학교 등이 있었고 여고로는 숙명, 진선, 정신여고 등이 있었다.
당시 신입생들의 해방구는 어디였을까. 강남역 인근의 디스코텍이 아니었을까.
디스코텍 (discothèque)은 프랑스어로, DJ가 음악을 틀면 중앙 무대에서 춤을 즐기는 곳이다. LP (혹은 disc)를 보관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1970년대 디스코 열풍과 함께 등장했으며 주로 댄스 음악을 틀어주는 공간이다. 오늘날 클럽의 원조 격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뉴욕제과 앞은 80~90년대 학번 대학교 새내기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던 곳이었다.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나면 강남역으로 향했다. 같은 과 친구들과 가기도 하고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성을 만나기 위한 장소라기보다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한 장소였다.
귀가가 늦다고 엄마가 혼내지도 않았고 아버지 마저 '일찍 일찍 다녀라'라고 가끔 한 마디씩 흘릴 뿐이었다.
대학 새내기. 나는 꿈도 없었지만 고민도 없었다.
1년은 그랬다. 적어도 1년은.
(다음 화는 11일에 발행하겠습니다.
백수가 새로 일을 시작하게 되어 정신없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