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남편과의 별거

불행한 가정은 어떻게 공중분해 되는가

by 비터스윗



"갑자기?"


어떤 결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준비한다.

남들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특히 어느 부부의 일이라면, 그리고 당사자가 아니라면.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짐작했던 그 이유로 인해 드디어 임계점에 도달했는지 또는 그 이유가 등줄기에 잔뜩 땀방울을 맺혀가며 방아쇠를 당길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는지는 당사자가 밝히지 않는다면 알 수가 있을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들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 , 톨스토이


그 이유들, 남들과 비슷할 수도 있고 결코 남들은 상상 조차 하기 힘든 이유들.

어쩌면 그때 나는 그 이유들이 남들 눈에 띌까 억지로 꽁꽁 숨기느라 녹초가 됐었는지 모른다.

남들에겐 ‘갑자기’지만, 나는 ‘드디어’ 그와 따로 살고 있다. 이제 2년이 가까워 온다.


이전부터 따로 살자는 말을 몇 년에 한 번씩 내뱉던 건 그였다.

그는 우리가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한 때부터 애들이 다 크면 따로 살자고 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힘들어진 것을 경제적 능력이 없고 규모 있게 살림을 하지 못했던 내 탓으로 돌렸고 남편이 사회적으로 더 '잘 나갈 수' 있었는데 번번이 내가 발목을 잡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내뱉어진 그의 비난과 불평은 시간이 지나면 또 잊혔고 그 흔적은 내 휴대폰에만 차곡차곡 쌓여갔다.


뭐든지 때는 오는 법.

2년 전 마침 집을 옮겨야 할 시기가 왔다. 취업을 한 큰 애는 직장 가까운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싶어 했고 둘째는 훨씬 이전부터 독립을 노래하던 아이였다.

나르시시스트 남편은 이번 이사에 대해서도 역시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고 나 역시 과거의 그 별거 선언이 이번 기회에 현실화되는 것인지 미쳐 궁금해하지 않은 채 둘이 살만한 조그만 오피스텔이나 소형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이 터졌고 나는 더 이상 그와 한 공간 안에서 살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어떤 의미일까. 측정할 수 있을 만한 거리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이 그들 아닌가.

상대가 다가올수록 내게는 기쁨이며 그럴수록 나는 기꺼이 나를 보여주고 내어준다. 내 공간을 제발 침범하라고 손짓한다.

솜털만큼의 거리마저도 원망스럽고 잠을 자는 시간마저도 아쉬워한다.


나도 그랬었다.

난 그를 사랑했다. 내 영혼을 송두리째 바쳤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된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그의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를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떤 모습도 내겐 티끌이 되지 못했고 그럴수록 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나를 책망하고 더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결혼은 내 사랑의 완성이고 종착역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정을 이뤘다. 두 아이가 태어났다. 내가 가끔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지만 주 수입원은 남편의 월급이었다. 부족함은 있었지만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고 나와 남편은 부모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남편이 회사일로 큰 고초를 겪게 됐다. 그 일로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지고 아이들의 학업과 진로도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간다고 했던가.

그의 부재중에도 나와 아이들은 무너져가는 집을 겨우 일으켜 세워 놓았다.

다시는 무너지기 싫었다.

하지만 배신으로 인한 모멸감은 그 어떤 물질적인 손실이나 육체적인 고통 보다도 회복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내' 공간을 침범하는 것. 나는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도 유리한 상황이 이어졌다. 내게 일 자리가 생겼다. 생전 처음 해보는 마트 캐셔 일이었다.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내 나이는 이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나이다.

내가 별거를 통보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자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다시 한번 생각하면 안 되겠냐.

난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작은 용달차를 불러 짐을 싸서 떠났다. 떠나는 모습을 보고 돌아서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이들의 독립이 슬픈 건 아니었다. 부모가 나란히 서서 독립하는 아이들을 향해 함께 손을 흔들어 주면 좋았을걸.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난 친정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월급을 받으니 적은 보증금이나마 가지고 집을 얻어 혼자 살겠다고 아이들에게 말했지만 나의 심리 상태가 걱정됐던 아이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외갓집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다행히 직장과 가까운 거리에 친정이 있고 남은 방도 있었다. 문제는 부모님과 자매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자매들도 응원해 주었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물론 부모님은 나와 남편이 잠시 시간을 갖는 것으로 지금도 생각하고 계신다.

그 후로 나는 친정 살이가 시작됐다.


아니 결혼할 때 떠났던 부모님 댁으로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