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으로 힐링하기
나는 날씨를 꽤 타는 편인데 특히 비 오는 날이면 맥을 못 춘다. 그렇다보니 장마철의 시작이 달갑지가 않다. 그저 자연의 섭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일 뿐. 자고로 장마란 높아진 온도와 습도로 인해 서로의 체온과 체취에 더욱 민감해지는 계절이 아니던가. '꿉꿉하다'와 같이 단어들마저 수분을 잔뜩 머금게 되는 나날들. 심지어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최근에는 한층 더 짙어진 농도의 여름이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머무른다.
그러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이 계절의 무게를 잘 견뎌내기 위해 나는 좋은 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꿉꿉한 날씨 탓에 한없이 맥을 못 추다가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기분 좋은 향기. 그래서 오늘은 향에 관한 글을 써보려 한다.
누군가에게는 향이 곧 그 사람의 이미지가 되기도 하는 법. 냄새든 향이든 과하면 역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왕이면 스스로도 편안함을 느끼고 상대에게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향을 찾고 싶었다. 요즘에야 많이들 알려져 있지만 향수마다 탑노트, 미들노트, 베이스노트 등 향의 레이어가 있고 동일한 제품이어도 뿌리는 사람마다 잔향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향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왠지 똑똑해지는 느낌도 나는 것 같고. 어쩌면 내가 힘이 나는 좋은 향수를 찾았을 때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그 향으로 기억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향수는 보기보다 까다로운 영역이라 실패도 여러 번 겪었다. 알다시피 향이라는 것은 직접 맡아보고 뿌려봐야 알지, 말이나 글로 설명되는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그걸 알면서도 유명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가 추천하는 향을 맡아보지도 않고 따라 샀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아뿔싸. 하지만 그 덕분에 내 취향의 향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으니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하지 뭐.
그러던 어느 날, 여행으로 방문한 프랑스 파리에서 인생향수를 만나게 되었다. 마침 매장에는 손님이 나 하나뿐이었고 친절한 직원분은 종 모양의 기구를 사용해서 나의 시향을 끈기 있게 도와주었다. Merci, monsieur.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향이어서 애지중지하며 사용했던 나의 인생향수는 펜할리곤스의 Vaara다.
탑 노트 : 사프란, 장미수, 당근씨, 고수씨, 모과
미들 노트 : 모로칸 장미, 아이리스, 불가리안 장미 오일, 프리지아, 인디안 목련, 작약
베이스 노트 : 꿀, 화이트 머스크, 시더우드, 샌달우드, 벤조인, 레진, 통카빈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화장대에도 이 향수가 있다면 매우 반가울 것 같다. 분명 흔하지 않은 향이지만 잔향이 세지 않고 은은하니 포근한 향이라 개인적으로는 가을철에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여담이지만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우디한 향을 레이어드하는 편이다. 특히 비 오는 날에는 약간의 흙냄새 같은 향이 꿉꿉함을 덜어주는 느낌이라 애용한다. 햇볕이 쨍한 날에는 날씨처럼 쨍한 시트러스 계열을 집게 되는 편. 아는 만큼 보이듯이 향도 쓰다 보니 나와 잘 맞는 향을 파악하게 된다는 점이 괜히 기분이 좋더라. 어른 같잖아. 아닌가? 암튼.
다시 나의 인생향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향수를 사용하면서 내가 장미와 샌달우드 계열의 향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절별로 사용하는 향수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인 방향이 같은 제품에 더 손이 가더라. 요즘은 향수가 아니더라도 가볍게 사용할 수 있는 미스트 제품도 브랜드별로 다양하게 출시되어서 좋다. 사실 향수나 캔들, 핸드크림처럼 향이 들어가는 제품들은 취향을 타기 때문에 선물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스스로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 편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향이 나와 잘 어울리기까지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겐 그 접점을 찾아가는 여정이 꽤 흥미로웠다. 누군가에게 내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 향기가 상대에게도 호감을 심어주는 향이기를 바란다.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유니크한 컬러를 분명 간직하고 있는 향. 이 계절, 내가 자주 손에 집어드는 향수는 르라보의 떼누아(Thé noir) 29다. 나는 이 향에 샤넬의 코코 마드모아젤 헤어미스트를 레이어링한다. 이로써 떼누아에서 부족했던 로즈향이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우아한 느낌을 추구한다면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조합이다.
Thé noir 29
탑 노트 : 무화과, 월계수잎, 라이트 베르가못
미들 노트 : 베티버, 머스크, 시더우드
베이스 노트 : 건초, 블랙티, 타바코
COCO Mademoiselle
탑 노트 : 오렌지
미들 노트 : 자스민, 로즈
베이스 노트 : 파출리, 베티버
당신에게도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 줄 향을 하나쯤 가져보기를 추천한다. 나에게 좋은 향이 취약한 여름 장마철을 잘 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주듯이, 살면서 지치는 순간이 찾아올 때 그 향이 보이지 않는 힘을 끌어올려줄 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향과 함께 하며 스스로와 친해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