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스타일 바꿔보기
직업 특성상 복장이나 스타일에 제약이 많은 편이었다. 통역사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기에 절대로 주인공보다 튀어서는 안 된다는 업계의 암묵적인 룰이 있다. 요즘은 통역 외에 사회자도 겸하는 경우들이 있다보니 컬러감이 있는 정장을 입는 것이 TPO에 맞는 경우도 있지만 '라떼'는 조금 더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를 의식한 탓인지 전문직 종사자 느낌을 내고자 한동안 짧은 기장의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했었다(물론 똑같은 인하우스 통역사*여도 직장 분위기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 경우에는 보수적인 집단에 속해있어서 그랬다).
*통역사는 근무형태에 따라 기관에 소속되어 근무하는 1) 인하우스 와 2) 프리랜서로 나뉜다
그러다 COVID-19 바이러스가 유행하면서 대면 교류가 현격하게 줄어들다보니 근무 복장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채색 정장들만 가득했던 옷장에 조금씩 컬러감이 더해지기 시작했고 짧게 유지하던 머리도 길러보았다. 하필이면 머리카락이 더디게 자라는 편이라 중간에 거지존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할 뻔했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버티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들에게 긴 생머리로 기억되는 스타일로 바뀌게 되더라. 최근에 알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나의 단발시절을 상상하지 못하는 수준이 되었다.
30대가 되고 나니 오히려 짧은 헤어스타일을 도전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더라. 더 이상 풋풋한 느낌을 내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아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흑. 그렇게 나이 탓을 하며 조금이라도 어려보이고 싶은 마음을 한 스푼 더해서 긴 생머리 스타일을 유지하던 중 스스로에게 변화를 주고 싶어졌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걸까.
여기까지만 읽으면 숏컷 헤어로 변신이라도 한걸까 싶겠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이는 중단발 레이어드컷/레이어드펌 스타일의 사진을 가지고 미용실을 찾았다. 어디선가 본 글에서 사람마다 모질이나 모량이 다르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느낌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미용사들이 고객이 원하는 스타일을 이해하기 쉽다고 되어 있어서 우선 말로 설명을 드린 다음 저장해 둔 사진들을 보여드렸다. "이렇게 해야 서로 오해가 없을 것 같아서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공감하시더라. '중단발 레이어드펌'이라는 표현이 고유명사 같아 보이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각자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는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입력값이 조금만 틀어져도 결과값이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쓰고 있는 이유는 나의 결과값이 기대치와 달랐기 때문이다. 분명 사진으로 보여드렸고 알겠다고 했는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상상했던 것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 21세기 아이유를 상상했는데 거울 속에는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오는 오스칼이 앉아있잖아. 이를 어쩐다. 그러나 소심한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컴플레인을 하지 못하고 집에 가서 스타일링을 다시 해보면 개선될 여지가 있을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웬걸. 매우 건강한 모질을 타고난 나의 머리카락은 컬이 짱짱하게 말려있어서 여간 고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주말이 지나고 출근준비를 하며 한숨을 푹 쉬게 되더라. 앞머리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루 종일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히는데 총체적 난국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출근했는데 주변에서 바뀐 스타일이 잘 어울린다며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 지난 몇 년간 못 보던 스타일인데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보이고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반어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듣다 보니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더라. 어라? 생각보다 남들 눈에는 괜찮아 보이나보네?
그렇다. 비록 나의 추구미와는 다른 방향이었지만 나의 미용사는 고객에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구현해 낸 것이었다. 선생님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그렇게 나는 오스칼 머리를 한 나 자신과 친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