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없는 불행 앞에서
(フェーズフリー)

2026. 3. 11 도쿄신문을 읽고

by 낭만팔레트

유비무환(有備無患)

: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이 없다는 뜻의 사자성어


주변 이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 중 하나는 "보부상"이다.

다급한 순간에 필요한 물건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성격.

덕분에 항상 가방 안에 잡다한 물건들이 한가득이다.

매 순간 필요하진 않아도 그 물건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면 뿌듯하다.

"역시 챙겨 오길 잘했어" "거봐, 필요할 것 같았다니까"


왜 이렇게 살게 되었나 돌이켜보니,

위급한 순간에 필요한 물건이 없어 곤란했던 기억이 있었던 것 같다.

나름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유비무환. 미리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할 일이 없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변수에 대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11년 3월 11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했다.

일본의 12개 도도부현에서 발생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 규모만 2만 명 이상.


눈 깜짝할 사이에 도시 전체를 쓸어간 거대 해일과,

이어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무수한 이들이 삶의 터전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그로부터 벌써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과연 우리는 그 세월만큼 더 단단해졌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 사람들에게 지진은 일상이다.

진도 2~3 정도로 흔들려서는 크게 놀라지도 않는다.

살면서 지진을 겪을 일이 거의 없는 한국인에게는

덤덤한 그들의 반응이 영 낯설게 다가온다.

그런 그들에게도 '동일본대지진'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아픔이었다.


- 비상시 마실 물과 식료품 비축해 두기

- 가구 고정해 두기

- 비상대피로 확인해 두기


어린 시절부터 셀 수 없이 받았을 방재교육을 통해

철저하게 대비했음에도 막을 수 없었던 비극 앞에서,

"아무리 준비해도 소용없었다"며 절망했던 그들은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준비"로 이어지는

"フェーズフリー(페이즈프리, Phase Free)" 개념을 도출해 냈다.


페이즈프리란,

일상(Routine)과 비상(Emergency)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비상 상황을 대비하여 특별한 가방을 싸두는 것이 아닌,

평상시 내가 신는 운동화와 볼펜 등에 '생존'의 감각을 심는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에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보호한다.


- 신발 앞꿈치에 강철심을 심어 건물 잔해로부터 발을 보호하는 초경량 기능성 운동화

- 젖은 종이나 영하에서도 사용 가능한 가압 볼펜

- 온수를 확보할 수 없어도 아기에게 먹일 수 있는 액체우유 등


살다 보면 갑작스러운 변화나 예기치 못한 슬픔이 덮쳐올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일상에서

켜켜이 쌓아온 나만의 '습관'일지도 모른다.


- 아침 공복에 마시는 미온수 한 잔

-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며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줄 때를 대비하여 휴대하는 손수건


아무리 대비해도 인간은 결코 완벽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는 늘 한없이 작아진다.

예고 없이 불어닥친 인생의 풍파 앞에 흔들리지 않을 장사는 없다.


완벽하게 견고한 만리장성을 쌓을 수는 없어도,

어떤 풍파에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나만의 건강한 루틴을 만들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읽게 될 누군가의 삶에

フェーズフリー의 개념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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