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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란킴데라

지금 우리는 위기를 맞고 있는가?

지난 11월 중순에 저희 모심과살림연구소는 “전환의 시대, 생명운동의 길 찾기”라는 제목으로 포럼을 열었습니다. 저희 연구소 설립 20주년을 기념해서 지난 6월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연 토론 행사였습니다. 협동조합, 돌봄운동, 탈성장, 그리고 공통장(commons)이라는 네 개의 주제가 각기 ‘생명운동’과 짝을 이루어 다루어졌습니다. 그날 오고 간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이 책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날 제가 인상 깊게 들은 두 개의 에피소드에 관해 저의 소회를 잠깐 말씀드리려합니다.

에피소드(E) 1: 토론자 김성훈 선생은 최근 어떤 조합원으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조합원은 “지난 10년 동안 생협 물건을 써왔는데 최근에 마켓○◯를 이용해보니까 그렇게 편하고 좋더”라며 생협을 떠났답니다.

에피소드(E) 2: 네 번째 발제자인 조미성 선생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길지 않은 몇 마디 언어로도 가슴이 뛰기 때문에 운동에 동참한다고 한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한살림선언을 처음 읽었을 때 우리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었다. 그러나 그 같은 언어는 더 이상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

E1의 예전 조합원 이야기에 우리가 놀라는 것은 지난 10년 동안 그에게 생협은 그저 친환경 물품 구매처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한두 해 지속될 수는 있어도 강산이 변하는 동안 생각이 변하지 않는 일은 매우 드문 법이지요. 아마도 과거에는 친환경 먹을거리를 취급하는 곳이 적어서 생협이 그런대로 매력적이었다면, 이제는 너도나도 ‘유기농’이라고 선전하는 곳이 많은 데다가 ‘새벽 배송’이라는 놀라운 서비스까지 곁들여지니 마음을 뺏기는 모양입니다. 한살림운동은 곧 세상을 살리는 생명운동이라고 믿고 있던 우리에게, 한 사람의 이탈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확실히 초기의 한살림생협은 ‘몸에 좋은 친환경 물품을 소비하고 싶다’는 조합원 공통의 욕구를 넘어서는 운동을 지향했습니다. 협동조합 운동의 선조들처럼 여전히 그것의 본령을 세상을 바꾸는 변혁운동으로 해석했고, 그 이념적 토대로서 생명운동의 담론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의 가슴이 뛰었던 겁니다. E2에서처럼 한살림운동을 이야기할 때 우리의 가슴이 쿵쾅거렸던 것은 우리 각자의 작은 활동이 세상의 큰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구매 행위는 이 나라의 오염된 땅을 살리고 농민을 살리며 마침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생활양식을 갈아엎게 될 거라는 믿음은, 곧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열어가는 데 내가 직접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협의 더욱 충직한 소비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내가 생협 물품을 더 열심히 소비할수록 세상의 변화는 빨리 다가올 테니까요. 그러니 E1과 같이 소비자가 이탈한다는 것은 조합원 개인의 활동이 세상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명운동 이야기에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E1과 E2의 현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좋은 생활재를 소비하고 싶다는 것은 개인 차원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협동조합은 이 개인 차원의 욕구를 집합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조직입니다. 자본주의 시장이 개인의 욕구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장인 데 비해서 말이지요. 또한 한살림선언에 나타난 생명운동 담론은 대면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공동체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초창기 반 모임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반 모임은 소비할 물품을 주문하는 장이었을 뿐 아니라, 생활나눔과 교육, 각종 생명운동과 관련된 행사나 프로그램의 정보가 공유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자연히 개인의 소비 행위는 철학적 가치를 운반하는 생명운동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구매할 물품을 결정하는 과정이, 혼자서 오직 가격과 품질, 편의성만을 따지는 요즈음의 환경과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이지요.

그 후 비대면 ․ 비접촉 생활이 빠르게 증가하는 방향으로 환경이 변화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 사회는 유독 앞서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고립의 시대에 한국이 가장 나쁜 성적을 내는 이유는 혁신과 기술혁신 때문”[1]이라고 말합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 덕분에 이제 우리 생협의 주문도 온라인 앱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문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조합원은 익명화됩니다. 소비라는 개인 차원의 욕구는 원래 자본주의 시장이 그렇듯이 철저히 개별화된 방식으로 해결됩니다. 매장에서도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고른 물건의 값을 계산대에서는 그저 알려줄 뿐입니다. 조합원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생명운동 담론 같은 것은 어디서도 접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체적 ․ 정신적 노동을 절약하고픈 욕망을 부추기는 대자본의 상품들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가령, 필요한 물건의 종류와 수량, 도착 시점 등을 미리 생각하고 따져서 주문하는 일은 상당히 번거로운 정신 노동임에 틀림없는데, 이에 비해 전날 밤의 즉흥적인 주문이 다음날 새벽에 실현되는 모습은 편리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마법이 아닐 수 없겠지요.

우리 한살림이 맞닥뜨린 위기는, 그야말로 초연결 시대에, 실제로는 철저히 고립돼있는 현대인들의 환경과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 개인의 어떤 행동이 바깥 세계의 큰 변화와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사람들을 모으고 서로 만나게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굳이 코로나 감염병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한자리에 모일 수 없을 만큼 너무 바쁘거나 모이기를 거부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만나고 관계 맺는 공생체를 꿈꾸었던 우리의 한살림 운동은 어느덧 이런 상호작용의 장(場) 만들기를 반쯤은 포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세상 환경이 그렇게 변했으니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제가 그 해답을 알 리 없습니다만, 이번 생명운동 포럼에서 여러 분들이 주신 지혜의 제언들을 종합해보면 무언가 하나로 수렴되는 방향이 보이기도 합니다. 각자도생의 시류를 넘어서서 ‘함께 살기’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함께 모이고 만나고 교류하는 상호작용의 관계 맺음을 확장해나가는 것, 농업과 먹거리 운동에만 한정할 게 아니라 다양한 이슈 및 세력과 손을 잡고 지역 기반의 생활운동 네트워크를 만들어 갈 것 등이 주문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지냈던,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 운동의 정신을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단지, 온라인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라는 핑계로 사람 관계의 단절을 방치하고 공동체적 시도를 포기하는 일은 그만하자는 것이지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 생협의 현안에만 매몰되지 말고 바깥세상 사람들과의 이종교배에도 적극 나서자는 얘기입니다. 단절된 관계의 끈을 다시 잇고 허물어져가는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보다 지금 우리에게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세계 경제를 ‘고립’이라는 키워드로 진단한 한 경제학자의 처방도 이와 같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다양한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낼 방안을 찾는 것이다. … 우리의 나라, 도시, 공동체가 얼마나 원자화되고 양극화되었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협력과 온정과 배려의 근육을 키운다면 서로 더 큰 연결감을 느낄 수 있고, 우리가 공동의 운명을 지닌 동일한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식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2]

신명호 모심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1] 노리나 허츠, 2021, 『고립의 시대』, 웅진지식하우스.

[2] 노리나 허츠(2021), 앞의 책, 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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