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그리움이

남동생 퇴직을 축하하며

by 김광희

마치 봄날처럼 며칠 동안 따뜻하더니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며 바람이 불던 2월 아침. 아파트 광장 눈을 쓸고 계신 경비원 아저씨 모습에 친정아버지가 생각났다. 긴 대나무비로 아침이면 마당을 쓸던 아버지. 대문에서 시작된 쓸기가 수돗가쯤 오면 자식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우리의 단잠을 깨우던 아버지 목소리. 특히, 늦잠이 초콜릿보다 더 달달하던 겨울방학엔 징그럽게도 듣기 싫었던 소리. 유리창을 때리는 바람 소리가 마치 마당을 쓱쓱 쓰는 것 같던 눈 내린 아침. 난 김 서린 창에 이젠 볼 수 없는 아버지 눈웃음을 크게 그렸다.


아버지가 쓸고 닦던 마당이 있던 집엔 세 가족이 살았다. 우리가 살던 본채를 중심으로 좌, 우 한 가족씩. 대문 옆 아래채엔 주류회사 차량을 운전하시던 분 가족이 살았다. 친정아버지처럼 늘 웃던 아저씬 우리 형제들을 당신 자식처럼 대했다. 수돗가 쪽 아래채는 친정 부모님 가게 앞에서 채소를 팔던 분이 살았다. 엄마 혼자 아이 둘을 키우는 게 안쓰러워 전세 대신 월세를 줬다고 했다.

결혼 후 차곡차곡 통장을 불리던 아버진 자식들만큼은 풍요롭게 살기를 바랐다. 첫아이인 오빠가 유치원 입학하기 전 은행 대출을 끌어다 산 109평 주택부터가 시작이었다. 은행 빛을 빠른 시간 내 갚기 위해 두 집에 세를 놨다. 젊음 하나로 버티며 일한 대가로 힘들게 집을 마련한 아버진 착한 주인아저씨였다. 쌀이 없는 집엔 쌀을. 월세가 밀린 집엔 시간을 주며 기다려줬다. 이른 새벽 가게 문을 열어두고 집으로 온 아버진 아침 먹기 전 마당을 쓸었다. 일을 해야 밥맛이 더 좋다고 했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셨을 거다. 마당 한쪽에 위치한 공동 화장실 청소 담당도 거의 아버지였다.

우리 가족이 그 집을 떠나기 전까지 세 든 가족은 네다섯 번 정도 바뀌었다. 모으고 모아 자신들 집을 사서 나가기도 했다. 그들은 가끔 명절이 다가오면 부모님 가게나 집으로 찾아와 우리 집에 사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서 좋았다고 했다. 사는 동안 주인 행세하지 않아 감사했다며 부모님께 큰 절로 인사한 분도 계셨다.


올 1월 설날 연휴가 시작되던 날. 오래간만에 남동생 집으로 친정식구들이 모였다. 부모님과 장남인 오빠가 돌아가신 후 친정이란 단어가 사라져 버렸는데. 시 소속 환경미화원이던 남동생의 새 집 이사와 정년퇴직 축하를 이유로 몇 년 만에 모였다. 이젠 어른이 된 조카들까지 새 아파트가 꽉 찼다.

길거리 청소가 주 업무였던 동생은 정년퇴직까지 오는 동안 내가 감히 상상도 못 할 힘듦이 있었을 거다. 번듯한 가장으로 묵묵히 할 일을 해 온 동생에게 엄지 척을 날렸다. 조카들이 준비해 온 현수막과 케이크도 온몸을 흔들며 막 춤을 췄다. 우린 영상으로만 보던 남미 축제에 온 듯 환호성을 지르며 축하했다.

나와 세 살 터울인 남동생은 돌아가신 부모님께 감사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살아계셨다면 다치지 않고 무사히 퇴직한 동생을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췄을 건데. 부모님을 대신해 우리가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거실에 차려진 상이 휘청거렸다. 20명이 넘는 사람들의 젓가락 소리가 요란했다.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추억 속에 싱싱한 회를 집던 나는 아버지가 그리워 코 속이 매콤해졌다.


아버진 손에 쥔 것 없어 팍팍했던 당신 삶에 막걸리 한 잔을 선물했다. 그 옆엔 올망졸망한 자식 여섯과 가오리회 무침. 가끔은 삭은 내가 진동하는 홍어회까지. 아버지가 한잔 하는 날이면 우린 둥근 양은 밥상에 둘러앉았다.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며 아버지가 서럽게 살아온 아픈 세월을 들었다.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다 비우고 나면 아버진 단내 나는 목소리로 흘러간 노래를 불렀다. 가끔은 당신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다는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울기도 했다. 졸던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이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코를 훌쩍거리던 아버지 모습이 내 가슴을 찌른다.


초등학생 때 난 가끔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했다.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술을 들고 오던 어느 날. 아버지가 맛있어하는 술맛이 궁금했다. 대문 앞에서 좌우를 살핀 후 내 목구멍으로 주전자 주둥이를 갖다 댔다. 달달하고 시큼한 게 술술 넘어갔다. 평소보다 줄어든 양에도 개의치 않고 아버진 환하게 웃으며 마셨다. 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아버지 곁에 앉아있었다. 이런 나에게 아버진 삭은 내가 진동하는 홍어회를 먹여줬다. 그 후 기억이 없다. 난 실컷 자고 일어났다.

아버진 나에게 단내가 풀풀 나자 안주로 홍어회를 줬단다. 그 후로 내가 또 술 심부름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했다면 아마 대문 앞에서 계속 마셨을 거다. 그래서 친정식구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은 '응큼한 술꾼'이었다. 그때 대문 앞에서 몰래 마셨던 막걸리 맛은 내가 지금도 즐기는 초콜릿보다 더 달콤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장사를 했던 부모님. 노동이 힘들어 휘청거리던 엄마 대신 집안일을 하며 우리를 보살펴주던 가정부 언니. 그런 우리들이 안쓰러웠는지 아버진 아침 시간은 함께하려 했다. 가방을 열어 연필을 깎아줬고 찢어진 교과서도 붙여줬다.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 긴 손발톱 정리와 명절 전 대중목욕탕 가는 것도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진 우리 형제를 대하듯 동네 아이들에게도 다정다감하셨다.


따뜻한 눈웃음 속에 자란 우리들에게 햇살 같은 축복이 내리는 건 모두 다 부모님 덕분이다. 특히 엄마 같았던 아버지. 남동생 집에 모인 우린 그리움에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막걸리 대신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서로 잔을 부딪치며 부모님과 얽힌 에피소드를 쏟아내며 큰소리로 웃다가 울기도 했다.

가족이란 신기한 숫자놀이인 것 같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8명이었는데 3명이 떠난 지금 20명 넘는 숫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얼큰한 취기를 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이 내게 물었다.

"엄마,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아. 난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어 모르겠다. 아! 부럽다. 아직도 아버지가 그립다는 김여사가."


아파트 광장이 환해졌다. 추위를 이겨가며 눈을 쓸어 준 경비 아저씨 덕분이다.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집을 나설 채비를 하려다 그날 딸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게 생각났다.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울 것 같아 그냥 취한 척하며 집으로 왔다. 코맹맹이 목소리로 나를 부르던 딸도 조용히 날 따라왔다.

난 식탁 위에 벗어둔 다초점 안경을 챙겨 쓰며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 딸아! 우리 쏟아지는 별 주우러 Sahara 가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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