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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Nov 15. 2024

네 이름은

든든, 단단, 알찬, 옹골진 그리고 사랑

어깨부터 등까지 욱신거리는 아침이다. 5일 동안 딸과 일본 교토, 오사카를 누빈 덕분이다. 퇴직 후 처음 맞는 생일이니 떠나자는 딸아이 말에 간 곳이다. 딸아이가 세운 계획표대로 구글 지도를 보며 앞서 걷는 딸을 따라 5일 동안 날마다 2만에서 3만 보를 걸었다. 내 느낌이겠지만 흐물거리던 허벅지가 기둥처럼 단단해졌다. 화끈거리는 발바닥은 출발 전보다 두꺼워졌고.  

    

10년 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당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재취업 준비 중인 딸과 막냇동생. 고등학생과 대학생인 조카 둘. 이렇게 5명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떠났다. 우린 미국 LA로 이민 간 친척 동생네를 중심으로 동부, 서부 여행을 하기로 했다.

LA 공항에서 입국 절차까지 마친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꺼풀이 떨린다. 친척 동생을 주기 위해 가져간 한약 즙이 공항에서 걸렸기 때문이다. 이미 입국 심사를 마친 동생, 조카들과 딸 도움 없이 온전히 내 손짓발짓과 짧은 영어로 설명해야만 했다. ‘이건 마약이 아니라 한국인이 건강을 위해 먹는 한약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했는지. 지금도 등에서 땀이 흐른다.

영어 듣기 세대인 조카 둘과 딸을 믿고 따르려 했는데.

입국 심사장 밖에서 밀가루를 바른 듯한 얼굴로 기다리던 딸에게 난 공항 밖 태양보다 더 붉은 얼굴로 갔다. 짧았지만 아주 긴 시간 후 만난 듯 우린 반가움에 더위도 잊고 껴안았다. LA는 끈적함을 유발하는 습도 대신 살갗을 찢을 것처럼 여름이 따가웠다.

친척 동생 집에서 머물며 LA 한인타운부터 도심지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동생네 자가용을 운전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아서 가능했다. 긴장하는 조카 둘과 딸을 데리고 막냇동생과 난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녔다. 걷기 힘들다는 아이들을 다독거리며 한 곳이라도 더 보려고 애를 썼다.

여행사를 통해 미국 서부와 동부 여행도 했다. 귀국 일주일을 남기고 미국 쪽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캐나다 국경을 넘었던 날. 우린 흥분했다.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에 취해서였다. 우린 캐나다 퀘벡 호텔에서 축하 파티를 하려 했다. 로비에서 맥주가 깨지지만 않았다면.

호텔에서 큰 조카와 딸이 시원한 맥주를 샀다. 종이 캐리어가 물에 젖어 찢어지면서 로비 바닥으로 떨어진 병맥주. 깨졌다. 유리 조각에 조리 샌들을 신고 있던 딸 발등이 다쳤다. 놀란 얼굴로 우리에게 알리러 온 조카와 로비에서 발등 피를 보며 떨고 있던 딸.

물에 젖은 새끼 새들이 새파란 입술을 벌리려 애를 쓰고 있었다. 놀란 조카와 딸을 안았다. 호텔직원이 내준 수건으로 딸 발등을 감쌌다. 여행사 가이드와 셋이 병원을 갔다. 다행히 유리 조각이 박히지 않아 6 바늘을 꿰매고 파상풍 주사만 맞았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목소리도 잠기고 눈도 풀리나 보다. 딸은 얼음 위에 맨몸으로 서있는 사람처럼 덜덜 떨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난 한여름에도 손이 차가운 딸아이 손을 꼭 잡았다. 언제라도 손이 따뜻한 내 기운으로 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도록 떠는 딸을 진정시켰다.

우린 30일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꽤 큰 금액으로 꿰맨(우리나라 10배 정도의 금액이었다.) 딸 발등 상처도 잘 아물었다. 딸 아인 여행 동안 엄마가 굉장히 든든하고 커 보여 많은 의지가 되었다며 날 칭찬했다. 난 어깨를 올려 세우며 어른스럽게 활짝 웃어줬다.


난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힘을, 이름값을 한 거다.

      

퇴직 후 처음 맞는 생일을 마치 첫돌 맞은 아이처럼 잔치를 해주고 싶다는 딸과 사위. 여행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여행을 준비했단다. 시간 빼는 게 쉽지 않은 직장인이라 셋이 가긴 힘들었다. 딸과 나 둘이 부산 김해공항에서 간사이공항으로 떠났다. 일정표를 빽빽하게 작성해 온 딸 뒤를 따랐다. 스마트폰으로 구글 지도를 보며 쇼핑, 맛집, 관광지를 찾아다녔다. 복잡한 노선인 지하철 환승에 버스까지. 우린 조금 버벅거렸지만 대중교통도 거뜬히 이용했다.

걷고 걷다가 딸은 군것질 좋아하는 날 위해 간간이 간식도 샀다. 딸을 따라다니느라 앞만 보고 걷는 나에게 ‘엄마 괜찮아’라며 쉬어가도 된다고도 했다.

60이 훨씬 넘은 난 쉬지 않고 좀 더 많은 곳을 보고 싶었던 예전의 엄마가 아니었다. 5일 동안 힘든 내색 없이 걷고 걸었지만 딸은 내 발걸음과 숨소리에서 ‘이젠 엄마도 늙었구나.’를. 든든하게 앞서던 엄마가 딸 뒤를 따르는 엄마로 변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여행은 힘든 만큼 사람을 자라게 한다. 오래간만에 딸과 함께한 자유여행에서 난 마음속 키가 새끼손톱만큼 자랐다. 까맣게 말라가는 가슴에 푸른 잔디 씨를 뿌리고 왔다. 이젠 검은 개를 쫓아내고 하얀 개와 푸른 벌판을 뛰어다닐 거다. 별 일없이 사는 게 심심하다고 외치는 내게 그게 최고라고 깨우쳐준 시간이었다.

손가락 힘이 빠져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해도 들어줄 딸과 사위가 나에겐 있다. 전구를 갈지 못해 캄캄한 화장실도, 녹슨 샤워기도, 흔들거리는 변기 뚜껑도 고쳐준다. 그들이 있어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다. 이런 나에게 그들의 이름은 불러도 불러도 끝나지 않은 명사, 형용사, 감탄사, 부사들의 나열이다.

<교토에서 건널목 반대편으로 걷던 가수 '비'를 마주친 딸이 내게 말했다. "엄마 가수 비야. 봤어." 난 왔던 길을 다시 후다닥 뛰었다. 뛰어오는 소리에 가수 '비'가 고개 돌려 날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와 눈 맞춤 후 난 아직 초록 불인 건널목을 다시 뛰어 딸에게로 왔다. ㅎㅎ 달리기 실력이 아직은 남아있다는 걸 딸에게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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