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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맛과 정성이 다른 거야

할머니표 쌈장 맛을 그리며

by 김광희

지인이 텃밭에서 키운 거라며 채소꾸러미를 엘리베이터로 올려줬다. 해뜨기 전에 뜯은 거니 잘 씻어 먹으란다. 27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10L 재활용 쓰레기봉투가 보였다. 주둥이를 겨우 묶은 봉투 안에는 상추, 쑥갓, 케일이 가득했다.

맛있게 잘 먹겠다는 전화를 한 후 개수대에 채소를 쏟았다. 행여나 허투루 버릴까 싶어 잎사귀 하나하나 소중히 씻었다. 아침이슬을 잔뜩 머금고 있는 채소들이 고개를 빳빳이 다시 쳐들었다.


바구니에 담은 채소를 한 주먹 쥐었다. 남아있는 물기 제거를 위해 벽을 향해 손안에 든 채소를 털었다. 타일 벽에 진주목걸이를 한 듯 물방울 여러 개가 생기더니 온 집안에 싱싱한 냄새가 풍겼다.

입맛을 다시며 난 냉동실에서 얼려둔 밥을 꺼냈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5분을 눌렀다. 냉장고를 열어 쌈장을 찾았다. 아뿔싸! 물기 적당한 채소들과 해동될 밥까지 준비가 끝나가는데. 쌈장이 없다.


길 건너 마트에는 여러 개의 쌈장이 진열돼 있다. 눈에 익은 회사부터 생소한 회사까지. 다 같은 쌈장일 건데 어떤 걸 사야 하나. 그냥 된장을 사서 집에 있는 고추장과 섞어 내가 만들어볼까? 진열대 앞을 서성였다. 그러다 눈이 딱 마주친 된장 진열대. 세상에, 된장도 쌈장 못지않게 진열대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했다. 장독대를 배경으로 할머니가 서있는 S 회사 된장 상표를 바라보다 지금은 곁에 안 계신 외할머니표 된장이 생각났다.


그때 난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거다. 외할머니는 비료 포대 같은 비닐봉지에 푹 삶은 콩을 한가득 넣더니 내게 그 위에서 뛰어 놀라고 했다.

할머니 집 담장 너머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열심히 제자리 뛰기를 했다. 아직 뜨뜻한 콩 열기가 발바닥으로 전해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할머닌 서너 번 정도 포대를 뒤집으며 계속 뛰라고 했다.

뛰는 게 힘들어 헉헉대면 할머니가 밟았다. 누구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건장한 남자가 밟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할머니는 포대를 열어 큰 대야에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처럼 된 콩을 모아 벽돌 모양처럼 만들었다. 뛰기를 멈추고도 할머니 곁을 서성거리는 나에게도 만들어보라 했다. 난 한 번 두 번 세 번을 집어 온 콩을 네모나게 만들었다. 완성품을 집어 드는데 힘없이 부서졌다.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할미처럼 손으로 콩을 치대야 해. 여러 번 치대면서 모양을 만들면 단단해져. 그러면 마르면서 쩍쩍 안 갈라지거든. 갈라져서 틈이 생기면 나쁜 곰팡이가 피기도 한단다. 그건 못 먹어. 그런 메주는 버려야 해. 자! 할미 보고 따라 해 봐.”

‘치대라니’ 무슨 말인지 몰라 난 바닥에 콩을 모아 손바닥으로 때렸다. 네모가 어려워 내 주먹만 한 크기로 만들었다. 만들면서 으깨진 콩을 입으로 가져갔다. 고소한 냄새에 비해 그렇게 맛있진 않아 뱉어내자,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저런! 이제 그만하고 나가서 놀아라. 다 같은 메주콩이라도 집마다 장맛이 다른 건 정성과 손맛 때문이거든. 올해는 우리 귀한 손녀가 밟은 콩으로 메주를 쑤는 거라 장맛이 좋을 건데. 그런 콩을 뱉으면 쓰냐?”

삐진 난 입을 내밀며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뛰어가 버렸다.


‘된장’이라는 명사 앞뒤로 다른 명사와 부사가 붙은 여러 회사 상표를 한참 쳐다봤다. 문득 서로 ‘원조’라고 우겨대던 유명한 식당들이 생각났다. 어떤 식당이 '원조' 조리법을 베꼈을까?

난 된장 하나를 집었다. 원재료명과 함량을 살폈다. 옆에 다른 회사 것도 하나 들었다. 두 회사 것을 비교해 봤다. 먼저 콩 종류가 수입과 국산으로 갈렸다. 그다음엔 소백분, 정제 소금 등등. 함량이 회사별로 조금씩 달랐다. 그런 이유로 회사별로 된장 맛이 달기도, 짜기도 하겠지.


난 처음 눈에 띄었던 S 회사 것을 샀다. 된장을 손에 쥔 채 싱싱한 채소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사 들고 온 된장 한 숟갈에 고추장, 매실청, 다진 마늘, 참기름, 깨를 넣고 섞었다. 제법 쌈장 티가 났다.

상추, 쑥갓, 케일을 쌓은 위로 밥과 쌈장을 올렸다. 참고 기다리느라 입안 가득 고인 침을 먼저 삼키고 향긋한 냄새가 진동하는 쌈을 입으로 넣었다. 방송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 내 귀에 울렸다. ‘그래, 이 맛이야.’


어설프게 만든 쌈장에 밥 한 그릇을 비웠다. 솜씨 좋은 할머니표 된장이었다면 더 맛있었을 쌈장을 그리워하며 하늘에 계신 할머니께 말을 걸었다.

‘할머니, 오늘 제가 만든 쌈장. 그래도 먹을만했어요. 저 잘했죠. 그때 할머니가 같은 콩이라도 집마다 장맛이 다르다고 했는데. 마트에서 파는 된장이나 쌈장도 회사마다 다르겠죠. 아무리 요리법을 훔쳐도 만드는 손맛과 정성이 다르니까요. 그래도 할머니. 저는 누가 뭐라 해도 할머니표가 짱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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