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만 톤의 꿈, 그리고 지리의 감옥
얼마 전 업무 차 중국 구이저우(귀주)성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귀주성은 빼어난 자연으로 유명하지만, 한국에서는 마오타이의 동네라고 소개하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습니다. 국제공항이 있는 구이양시에서 차로 약 3시간 정도를 달려가면 마오타이주를 포함한 다양한 브랜드들이 '장향' 바이주 생산을 위해 마오타이진이라는 동네에 모두 모여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마오타이그룹이 재단을 맡고 있는 마오타이 대학교가 있습니다. 이 대학교의 간판 학과는 마오타이 주조공학과이며, 중국 유일의 국가 지정 바이주 연구소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자가 이 학교에 교수로 있던 덕분에 마오타이주와 마오타이진의 특징, 역사, 생산과정도 접하게 되었고, 마오타이 본사 방문과 다른 바이주 공장을 견학하며 좋은 경험을 하고 왔습니다. 그러던 도중, 1970년대 10년간 진행되었던 마오타이의 공장 확대 시도에 대해 재미있게 듣게 되었고, 이를 추가조사하여 자연자원을 활용한 우수한 사례로 소개해드리고 싶어서 연재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972년 2월, 베이징.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20년 넘게 적대 관계였던 두 강대국의 역사적 화해 순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건배를 제의하며 들어 올린 술이 있었다. 구이저우(貴州)의 깊은 협곡에서 온 마오타이주였다.
이 장면은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마오타이는 하룻밤 사이에 '중국의 술'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술'이 되었다. 1971년 UN 상임이사국 지위 회복, 중일 수교, 그리고 미중 관계 정상화. 굵직한 외교 이벤트가 이어질수록 마오타이의 위상은 높아져만 갔다.
그러나 위상과 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마오타이 공장의 연간 생산량은 600~700톤에 불과했다. 전 중국 인민은커녕, 늘어나는 국빈 만찬과 재외공관의 수요를 충당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1970년에는 문화 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생산량이 232톤까지 곤두박질쳤다. 마오타이 공장은 1962년부터 1977년까지 무려 16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마오타이주를 더 많이 생산할 수는 없는가? 1만 톤을 만들 수는 없는가?"
전국계획회의에서 저우언라이가 던진 이 질문은 단순한 증산 지시가 아니었다. 당시 연산 600톤인 공장에 1만 톤을 요구한 것은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혁명적 과제였다. 이 목표는 1958년 마오쩌둥 주석이 청두회의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기도 했다. 국가 지도자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기존 공장을 확장하면 되는 일에 '복제'라는 극단적 방법이 등장하게 되었을까?
답은 마오타이진(茅台鎮)의 독특하고도 가혹한 지리에 있었다.
마오타이진은 츠수이강(赤水河)을 낀 깊은 협곡에 위치해 있다. 해발 400~450m의 분지가 1,000m 이상의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다. 평지가 거의 없어 대규모 공장 증설을 위한 부지 확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현지에서는 "寸土寸金(손바닥만 한 땅도 귀하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교통도 문제였다. 1970년대 구이저우의 도로 인프라는 열악했다. 1만 톤의 술을 빚으려면 수만 톤의 수수(고량)와 석탄이 필요한데, 험준한 산악 도로를 통해 이를 운송하는 것은 물류적 악몽이었다.
환경 용량도 한계에 다다랐다. 좁은 협곡에 무리하게 생산 시설을 늘릴 경우, 마오타이주의 생명인 츠수이강의 수질이 오염되거나 미생물 생태계가 파괴될 위험이 있었다. 1972년 국가는 마오타이진 상류에 공장 신설을 금지하는 수질 보호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환경을 지키는 조치인 동시에 공장 확장의 발목을 잡는 족쇄이기도 했다.
중앙정부와 과학자들은 결단을 내렸다.
"공장을 확장할 수 없다면, 마오타이의 환경을 복제한 새로운 공장을 교통이 편리한 곳에 짓자."
이것이 '귀주 마오타이주 역지생산시험(貴州茅台酒易地生産試驗)'의 태동 배경이다. '역지(易地)'란 '다른 곳에서'라는 뜻이다. 마오타이진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마오타이를 빚을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국가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1975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경공업부는 이 프로젝트를 국가 중점 과학연구 프로젝트로 지정했다. 일명 "중국 바이주 1호 공정(中國白酒一號工程)"이라 명명되었다.
목표는 명확했다. 마오타이진이 아닌 곳에서, 마오타이와 똑같은 술을 만들어내는 것.
그러나 이 야심 찬 계획이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필요로 하게 될 줄은, 그리고 그 결과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줄은,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이 글은 Google Gemini, Chatgpt, Perplexity, Claude 등 인공지능과 함께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