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맘이 Jan 27. 2021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

프롤로그: 간암 환자의 가족

"울지 말고 들어."


엄마 목소리엔 이미 슬픔이 가득했다.


"무슨 일 있어?"


내 목소리도 떨렸다. 수화기 너머 정적이 흘렀다. 엄마는 말을 잇다 말고 흐느끼기를 반복했다. 나는 온몸이 오슬오슬했다.


"아무래도 아빠가 간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암인 것 같다고..."


엄마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눈물이 팍 터져버렸다. 택시 운전사는 룸미러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뒷자리로 팔을 뻗어 휴지 두어 장을 건넸다. 고맙단 말도 못 하고, 나는 휴지를 건네받고서 힘껏 움켜쥐었다.


"아빠 어떡해, 아빠 진짜... 어떡해..."


나는 계속 같은 말만 내뱉었다. 엄마는 뭐라고 나를 다독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끊었다.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더는 이 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새벽 1시가 다 된 때였다. 내달리는 택시 안에서 한강을 바라봤다. 물결도 보이지 않고 그저 칠흑같이 어두운 웅덩이였다. 빤히 볼수록 눈이 시렸다. 눈물보가 다시 터질 것 같았다. 거대한 강처럼 무서운 상상이 나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겨우 고개를 쳐들어봤다.


서울 고층빌딩이며, 양화대교도 다 반짝반짝거렸다. 세상은 이렇게 예쁜데, 내 현실은 이리도 흉하다. 밖을 내다봐도 속절없이 울음이 났다. 취기가 올라왔다. 얼른 가방을 열고서 구토했다.


자이언티 노래 '양화대교' 가사가 떠오른다.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말고" 내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전화벨이 또 울렸다. 그 순간부터 엄마와 나의 일상엔 '아빠의 암' 뿐이었다. 암 덩어리가 우리 가족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2020년 12월 3일, 아버지의 암 발병 사실을 밤 늦게야 알았다. 회사 분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 날이다. 평소 회식해도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하필 그날은 진탕 마셨다.


하필 회사 분들과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진 날이었다. 매일 끼고 사는 휴대폰인데, 그날은 어디 내버려 둔지도 모르고 와인을 진탕 마셨다. 집은 한참 먼 탓에 진작 자리를 뜰 수도, 또 누가 강요하지 않았으니 아예 끼질 않을 수도 있었다. 그냥 나 스스로 취하고 싶은 나날이었다. 내가 하고픈 일이 '기자질'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잘하는 일은 아닐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힘들 때 덜 마시고 기쁠 때 더 마시는', 그게 술이라고 들었건만.


아버지는 술 한 방울도 입에 대기 힘겨워하는 사람이다. 연말 회식에야 겨우 술자리에 이끌려가는 분이다. 어린 시절, 삼 남매가 송년 분위기에 젖어 늦게까지 텔레비전으로 연말 시상식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는 시뻘건 얼굴을 한 채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진작 보일러 온수를 켜놓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화장실에서 아버지의 구역질 소리가 들릴 때면, 우리 남매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러면 텔레비전 속 연예인들만 신나게 떠들고, 나는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숨 죽였다. 아버지가 대단히 느껴지면서도 안쓰러워서, 가슴속은 복잡하기 그지없는데 막상 얼굴 맞대면 아무 말도 못 해서 그랬다.


그냥 잠결에, '돈벌이'란 내 몸도, 마음도 희생해야 하는 일이란 걸 생각했다.


엄마와 통화가 길어졌다. 울지 말라고, 괜찮을 거란 말이 전부였다. 택시가 동네 몇 바퀴를 빙빙 도는 동안, 겨우 차에서 내려 걷는 와중에도, 나도 모르게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도 눈물이 났다. 일만 하다 병진 아버지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사실 내가 싫어졌다. 나이 서른 가까운 데도 부모에게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워서다.


나에겐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남들 버젓이 취직하고, 결혼하고 잘 사는 걸 봐도, 나는 '나만의 인생'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이제와 돌아보니 '자기 합리화'였다. 그 시간을 묵묵히 기다리고 지켜봐 준 아버지가 내 뒤에 있었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이것저것 시도하는 와중에, 아버지와 함께 할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의 방황도 대단히 여겨줬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정형화된 삶을 강요하고 재촉한 일이 없다. 엄마가 입 닳도록 '공무원 시험'을 쳐보라고 잔소리해도, 아버지는 나더러 네 뜻대로 살면 된다고 다독여준 분이다. 다큐멘터리 취재작가, 광고기획자로 일하다 그만두고, 여행작가 수업도 듣고, 웹툰도 그리고, 언론대학원도 다니고 기자 일도 해보다, 지금은 이렇게 방구석에서 글을 끄적인다. 이리저리 떠돌긴 했어도, 여전히 내가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힘은 다 '아버지' 에게서 나온다.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과 엄격한 자기 규율이 나를 키웠다. 내가 기댈 곳이면서, 본받을 분이 아버지다.


아직 아버지는 나를 떠날 수 없다. 내가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 잔뜩 받았는데 갚을 기회도 없으면, 내가 아버지에게 너무 미안해서 힘들 것 같다.


눈물로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여느 때보다 부지런히 아침을 맞았다. 술기운을 떨치고 새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내 일상도, 아버지의 치료도 다 잘 될 거라 믿기로 했다. 이전보다 더 하루하루를 알차게 채워보자고 결심했다. 아버지와의 접점을 많이 만드는 게, 내 일과에서 중요해졌다.   

   

2020년 12월, 아버지가 간암 판정을 받았다. 암환자의 가족이 할 일이 많아 보여도, 실은 단순한 것 같다. 환자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 씩씩하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