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빈소에 뒤늦게 도착했다. 온통 검게 차려입은 가족이 나를 맞아주었다. 영정 사진 속 할아버지랑, 상주복을 입은 아버지를 번갈아 보는데 순간 머리가 어질 했다. 서울에서 주치의에게 듣고 온 아버지의 검사 결과와 입원 예정일을 알려야 하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향로에 향을 꽂았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온통 희뿌옇게 보였다. 재배하고 일어서려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고요하던 빈소에 곡소리가 울렸다. 내가 이렇게 소리 내 울 거라고 생각 못했다. 그런데 산 사람이 아플 걸 생각하니까, 갑자기 나도 모르게 울부짖었다.
할아버지 빈소에서 상주인 아버지는 줄곧 말이 없었다. 나랑 엄마만 연신 울었다. 아버지가 간암으로 아픈 걸 아는 건, 둘 뿐이었다.
"암은 몰라도, 마음 아픈 건 같이 져야지."
엄마한테 마음 굳게 먹자고 한 말이었다. 아버지의 암도 나눠가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거다. 그러지 못하니까, 이별의 고통만이라도 나누자고.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아픈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 했다. 빈소에 망연히 앉은 가족들을 이따금씩 둘러볼 뿐이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시선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프다, 힘들다 티 내면 좋겠어요.'
코로나 시국 탓에 조문객이 없어 빈소는 조용했다. 아름아름 찾아오는 분들도 있었지만, 3일장 동안 삼촌들, 사촌동생들, 할머니가 빈소를 지켰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믿기지 않는지, 다들 어리벙벙한 얼굴이었다. 나 역시 처음엔 그랬지만, 얼마간 지나 아버지를 생각하니 자꾸 슬픈 수렁 속에 빠졌다. 산 사람이 살아야 하는데, 심신이 다 아프니 안쓰러운 마음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지도 않았다.
할아버지 발인하던 날, 아버지 얼굴엔 황달기가 보였다. 3일 내내 잠 한숨 제대로 못 잔 탓에, 몸이 아프다고 더 신호를 보낸 모양이다. 할아버지껜 죄송하지만, 아버지가 그냥 눈 좀 붙이면 싶었다.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꿋꿋하게 버텼다. 그걸 보는 내 마음만 무너졌다.
출상 행렬 속에서 유독 나와 엄마의 곡소리가 컸다. 냉기가 도는 안치실에서 재배하는데, 더는 목이 아파서 소리가 안 나올 지경이었다. 고개 들어 영정 사진을 보는데, 마음을 고쳐 먹었다. 할아버지가 너무 환히 웃고 계셨다. 늘 말씀하셨다.
"우에든동 재밌게 살아."
삶에 재미를 느끼라고,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다. 울고 짜고 이제 그만, 다시 웃자. 매 순간을 즐겁게 쓰자. 그게 할아버지가 바라는 걸 테니까.
'할아버지! 어디서든 즐거우시길 바라요. 아버지도 이 세상에서 더 많이 웃다 갈 수 있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