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라 할 수도 없는 글일 것 같다
그냥 오늘은 주절거릴 말이 좀 많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보르헤스정도는 읽어야지, 게다가 재미있어 보이는군 하면서 고른 책인데
진입장벽이 생각보다 높게 느껴져 당황하는 중이다
그와중에 놀라운 것은, 내가 분명 이 단편들을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닌데도
대단한 작품이라는 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는 과연 보르헤스로군
그러니까,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해야할까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것봐라 너 이거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하는 식으로 썼다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원형의 폐허들이나 바빌로니아의 복권 같은 작품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세상은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대로
미로와 거울 속을 헤메는 그런 것일 텐데
지금껏 내가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이 세상 위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 건지
잠깐 생각했었다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냥 물흐르듯 따라가면서 살면 되는 걸까
그런데 또 물흐르듯 사는 것도 힘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하고 고민을 잠깐 했었다
지금도 하고 있긴 한데
이러다 또 마는 건 아닐까 싶어서
무슨 소리냐면
그냥 이것저것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졌다는 그런 말이다
푸코가 보르헤스를 읽고
지금까지 익숙하게 생각한 모든 사상의 지평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는데
나는 카프카의 소송을 읽으면서 그랬는데
푸코의 말대로 보르헤스의 책을 읽고 있으니 정말
지평이 무너지는 것 같아
어떻게 버티지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안나 카레니나를 얼른 읽어야겠다
안나 카레니나도 읽고 있다
2권째다
생일선물로 소중한 친구한테 받은 책
나는 제인에어 같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이거 어떤 느낌일까 걱정 반 기대 반 하면서 펼쳤는데
매우 좋다
이래서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라 하는거로군
이토록 촘촘한 묘사라니
이토록 힘겹게 고민한 흔적들이라니
근데
안나 카레니나는 전부 1500페이지 넘을텐데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이백 페이지가 조금 넘는데
게다가 단편집인데
나는 지금 보르헤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안나도 재미있어
무엇보다도
보르헤스를 읽었다고 해서 보르헤스에 대해 쓸 순 없을 것 같아
게다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고민이 이러다 그냥 말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불안하기도 하고
일단 마저 읽어야지
보르헤스든 톨스토이든
픽션들이든 안나든
이모 중 한 분이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그런데 난 너무 나쁘게도
그것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이모 중 한 분이 아프구나
그것도 심각하게 아프구나
하고 말았다 엄청 나쁘게
그런데 그 파킨슨병이 치매의 일종이라고 했다
이모는 치매의 일종으로 죽을거라고 했다
그러면 이모의 기억 속에선 나는 없어질텐데
나와 막내동생인 우리 엄마와 내 동생과 외할머니와 이모의 남편과 이모의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손주들을
단 한 명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일텐데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모에게 무슨 의미로 남게 되는 거지
이모는 이 세상에 무슨 의미로 남게 되는 걸까
이모가 등이 굽고 손, 발이 떨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 보다도
내가 이모에게 아무 의미로 남을 수 없다는 게
이모가 이 세상에 어떤 의미로 남겨질 지 모른다는 게
더 무서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얼마 전에 쓴 그 오징어의 거대한 오징어처럼
무엇이든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모디아노의 책을 읽을 땐 막연하게 그래 맞아 기억은 중요해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모디아노가 왜 기억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와닿는 것 같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읽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낀 걸까
나중에 내가 내 기억 속에서 이 모든 것들, 무엇을 읽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낀 건지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 날이 올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다
아주아주 오랜만에 요조를 듣고 있다
사실 나는 고등학생때 까지만 해도 인디가수들만 들었었는데
요즘은 잘 듣지 않았다
델리스파이스, 언니네이발관, w, 요조, 장기하와 얼굴들,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브로콜리 너마저
이런 가수들 참 좋아했었는데
왜 요즘은 듣질 않았지
하여튼 내 기억속에 요조는 달콤달콤한 사랑노래를 달콤달콤한 목소리로 부르는 가수였는데
어제 <나의 쓸모>라는 노래를 듣고 너무 좋아서
거짓말 섞어서 스무 번을 넘게 들었던 것 같다
가사가 너무 좋아 게다가 몽환적인 것도 좋아 목소리도 좋아
요조 좋아
세상에는 이렇게 부를 노래가 많은데
내가 굳이 또 이렇게 음표들을 엮고 있어요
사실 내가 별로 이 세상에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있는데에는
어느 밤에 엄마 아빠가 뜨겁게 안아버렸기 때문이에요
어감이 좋은 동네에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이름이 무서웠거든요
모두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그 방법은 다들 다르더군요
결과적으로 나는 또 멍청이가 된 것 같은데 어떡하죠
요조 <나의 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