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번. 현학자의 사려깊은 고양이

글쓰기 좋은 질문

by 도단

이봐.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뭐지.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 집에서, 나와 고양이만 살고 있는 이 작은 집에서 나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이유는 없다. 잘못 들은 걸까. 뒤를 돌아보니 고양이가 탁자 위에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다. 역시 잘못 들었나. 이젠 막 헛것이 들리네. 귀도 다 먹어 가는데 아까 그 소리는 어떻게 들린 걸까. 정말 또렷이. 또렷이 들렸는데. 드디어 노망이 든 건가 싶었다.


빨래를 다 개고 굽은 등을 겨우 펴며 힘겹게 거울 앞으로 갔다. 세월을 피하지 못해 얼굴엔 검버섯과 주름이 가득했고,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팔다리는 빼빼말라 볼품없다. 싱그러운 초록이 집 앞에 만개했고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겼다. 탄력 있는 가슴과 힘 있는 엉덩이,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을 때가, 젊음 그 자체로 빛나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지나간 시간이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주름뿐이다.


씻었으니 크림을 발라야지. 거울 옆에 놓아둔 크림을 집어 얇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주름이 깊게 팬 입가 근처에, 탄력이 떨어져 늘어진 볼에. 주름 사이사이에 때처럼 낀 크림을 살피며 어제보다 더 나아진 게 없는지 찾았다. 그러자 다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 나이가 돼서 그걸 바르면 뭐해. 주름이 펴지나?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가 나 홱 뒤를 돌아보니 고양이가 앉아 있다. 어느새 여기로 온 거지. 아까까지만 해도 저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는데. 나이가 먹어도 고양이는 고양이구먼. 그토록 유연하게 내려와 여기까지 살금살금 오다니. 고양이는 하얀 털을 혀끝으로 핥고는 입을 오물오물 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인간들이 하는 일이라곤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


멍청히 두 눈을 꿈뻑이며 고양이의 입을 쳐다봤다. 뭐지.


내가 여태까지 당신 옆에 있어준 것만 해도 감사히 여겨.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지금 나는 고양이가 말을 하는 장관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와 같이 늙어온 고양이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이 녀석이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고양이가 말을 하다니. 그러다 문득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를 떠올렸다. 과연 나쓰메 소세키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 책 속의 고양이는 주인에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이 고양이만큼의 식견은 갖고 있었다. 똑똑한 놈일세 그거.


너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왜 이제야 말을 하는 거지? 여태껏 한 마디도 하질 않다가.


그러자 고양이가 혀를 차고는 말했다.


꼭 말을 해야 하나? 말을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 꼭 말을 하라는 법이 있어? 필요할 때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여간 인간들이란. 당신네들은 왜 평소엔 같잖은 걸로 실컷 떠들다 꼭 말을 해야 할 때에는 입을 다무는 거야? 당신도 그렇잖아.


내 생활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딱히 잘 모르겠는데. 늙은 노인네가 누구랑 말을 한단 말인가. 그래도 이 고양이에게는 이것저것 말을 걸긴 했었지. 그래도, 평소에 말이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말이 필요할 때도 없었다. 혼자 사는 내가 무슨 말이 필요해.


난 혼자 살잖아. 네가 말을 하는 줄 몰랐으니, 나 혼자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내가 뭐 꼭 무슨 말을 하면서 살아야하나. 난 이제 말이 필요한 나이가 지났어.


고양이는 파란 눈을 씰룩이며 비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 당신은 말이 필요한 사람이지. 이렇게 책을 쌓아놓고 살면 뭐해. 지금 이렇게 혼자 사는 것도 이 세상이 싫어서 들어온 거 아니야? 무엇 하나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이거야 원. 불평만 많은 사람이로군, 정말. 내가 말을 하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당신한테 이 말을 하기 위해서야. 당신이 틀렸어. 세상이 틀린 게 아니고.


고양이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봤다. 내가 틀렸다. 지금껏 혼자 살면서 내가 틀렸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똑똑한 고양이는 내가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게 틀린 것 같아 보이는데?


당신은 당신의 문제도 모르고 있군.


고양이는 혀를 끌끌 차며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유연한 다리로 턱을 괴고 생각을 하더니 마음먹은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맞춰 살고 싶은 마음은 없는 거잖아? 그토록 자존심이 세다면 세상을 바꿀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당신은 교편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도 있었어. 그 아이들을 올바르게 지도했다면, 현명한 시민이 되었겠지. 하지만 그러지도 않았어. 맨날 앉아서 글만 쓰고, 나중엔 그것마저 하지 않았지. 일을 하기 두려운 거야? 내 눈엔 그렇게 보여. 그렇게 평생을 아무것도 하질 않으면서, 꼭 말을 해야 할 때, 옳은 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 입을 다물었지. 겁만 많으니까. 해보지도 않고 이 세상이 마음에 안 들다 욕만 해대고. 당신 문제는 그거야.


나는 고양이의 파란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 고양이 제법 똑똑하구나. 내가 여기서 백날 책을 읽고 앉아 있어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이 세상은 잘 굴러갈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잉여인간이 되는 거고. 말 그대로 잉여인간. 창조적인 무언가를 할 생각도 없고, 앉아서 불평만 하는 인간.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었다. 예전보다 겁이 많아졌다는 소리다. 이젠 끔찍한 것은 지나갈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은 그대로 변하지 않고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정부는 저대로 그냥 저렇게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제와서 밖으로 나가 말을 하더라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어차피 바뀌는 건 없을 텐데.


너는 몰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고양이는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있을 거라고?


나는 고양이와 등지고 크림의 뚜껑을 닫았다.


바뀌지 않을 것에 괜한 기대를 갖는 건 좋지 않아.


그 때, 마당을 향한 유리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뒤를 돌아보니 고양이가 집 밖으로 나가있다.


한계야. 난 내가 할 말 다했어. 당신한테 뭐가 문젠지 말도 해줬고,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방법도 알려줬어. 그걸 하지 않은 사람은 당신이야. 당신은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질 않아? 그 자리에 앉아서 책만 읽고 있으면 뭐해. 실체도 없는 헛소리들뿐인걸. 책을 읽는 다고 이 세상이 변하나? 그렇다고 세상에 맞춰 살 용기는 없고. 나가서 말을 할 용기는 더더욱 없고. 됐어.


나비가 날았다. 노란 줄무늬가 그려진 나비. 고양이는 잠시 나비에 정신이 팔려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비에 눈을 빼앗겨, 나비가 위로 날면 고양이도 위로 뛰었고, 나비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온 몸의 신경을 집중해 참을성 있게 달려들었다. 고양이는 뛰는 모습도 우아하구나. 곧 정신을 차리더니 말을 이었다.


잘 있어. 난 적어도 이렇게 앉아서 현상만 말하는 고양이는 아니니까. 난 나가서 돌아다닐래. 더 좋은 세상이 밖에 있다는 걸 이미 알아. 당신은 평생 여기서 이렇게 살 팔자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고양이는 말이 끝나자마자 집 옆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홱 꺽어 들어갔다.


나는 망연히 앉아 내 유일한 말동무가 사라진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한꺼번에 피곤함이 몰려온다. 오늘, 고양이가 말을 했고, 나를 비난했고, 집을 나갔다. 나는 여기 앉아 있고. 천천히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에구구. 허리가 어제보다 아프군. 안방에 놓아둔 고양이 밥이 떠올랐다. 이제 고양이 밥은 필요가 없겠네.


자리에 누워 내가 걸어온 날들을 생각했다. 나는 늘 입을 닫았고, 무엇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불만은 많았고, 세상은 그러든지 말든지 였다. 그 고양이는 뭘 몰라. 목의 주름을 만지며 생각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옆에 있는 책을 꺼내들며 또 다시 생각했다. 주름이 어제보다 더 늘었군.


니체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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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고양이 한 마리만 키우며 인생을 홀로 지낸 인생의 낙오자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고양이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하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뭐라고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