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 폴리틱스

인간이 아닌 다른 종(species)에게 존경심을 느끼다

by 준용

작년의 어느 더운 날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영화가 개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서점에서 가장 잘 보이는 매대에 이 책이 놓여있었다.

영화는 지금까지도 안 봤지만, 이전 시리즈까지 너무 재밌게 봤기에

정말로 침팬지가 영화에서 나오는 행동이 가능한지 궁금해 구매했다.

조금 읽다가 흥미가 떨어져 미뤄놓고 반년이 지난 이제야 읽어 보게 되었다.


그 당시에 흥미가 왜 떨어졌을까 의아했다.

우선, 내가 읽은 것이 책인지 아니면 영화였는지

책이었다면 소설을 읽었던 것인지 헷갈렸다.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네덜란드 아른험 동물원에 있는 침팬지 집단의

관찰 기록을 정리한 내용임을 아는데도 혼동이 되었다.

그렇게 몰입해 읽다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전율을 느꼈다.

침팬지를 보러 갈 때마다 나는 늘 감사해한다. 정치의 기원에 대한 전통적 주장에 의문을
던지게 해 준 한 편의 정치적 드라마를 볼 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런 올바른 시공간에 내가
존재했던 것에...

침팬지 사회 키워드

책의 말미에 나오는 치팬지 사회에 대한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 공식화 : 서열의 공식적인 승인

- 영향력 : 공식 서열과는 별개로 집단생활에 미치는 각 개체의 영향력

- 연합 : 장성한 수컷들 사이에서 자주 보이는 권력 상승을 위한 연합. 고립화 전술을 주요 사용

- 균형 : 세력 균형을 위해서 상호 간의 연합, 개인 싸움 능력, 암놈의 지지 등의 기반이 필요

- 안정 : 암놈들 사이의 관계는 수놈들에 비해 덜 계층적이며 훨씬 안정적. 수놈들을 중재하기도 함

- 교환 : 선물이나 재화보다 사회적 호의를 교환. 리더는 사회적 안전 제공 및 구성원들의 지원 재분배

- 술수 : 다른 침팬지들을 사회적인 도구로 이용함

- 합리적 전략 :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지배 전략을 미리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

- 특권 : 지위가 높은 수놈이 더 자주 교미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음


해당 키워드는 아른험 동물원의 침팬지 집단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키워드라 생각한다.


이에룬, 라윗, 니키

권력 쟁탈에 있어서 가장 비중이 큰 세 마리의 수컷 침팬지는 이에룬, 라윗, 그리고 니키이다.

이에룬은 나이가 가장 많은 수컷 침팬지이며 서열이 바뀌어도 꾸준히 영향력이 크다. 라윗은 이에룬과의 경쟁적인 친구 관계에 있는 침팬지이며 이에룬보다 약 5살 정도 어리다. 두 개체는 아른험 동물원에 오기 전에 코펜하임 동물원에서 있었으며 그 당시 각각 나이가 30살, 25살 정도로 추정되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서로 알고 지낸 사이이다. 그리고 니키는 침팬지의 사춘기 시절이 끝날 즈음, 열 살 무렵에 키우던 주인이 동물원에 맡긴 침팬지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머리도 똑똑하고 아른험 동물원 침팬지 우리 집단내에서 가장 민첩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12살이 되자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비슷한 또래의 다른 침팬지인 단디와 비교했을 때 2배 정도로 커졌다. 작가의 말로는 니키가 모든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는 침팬지라고 한다.


서열의 흐름

처음에는 이에룬이 서열의 1위, 라윗이 2위 그리고 니키가 3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공식적인 서열은 '인사'라는 행동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서열이 낮은 침팬지가 서열이 높은 침팬지가 지나갈 때 몸을 최대한 낮게 엎드리는 등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열이 높은 침팬지는 행동에 대해 응답을 할 때도 있고 거만하게 지나칠 때도 있으며, 서열이 바뀌기 전에는 '인사'의 빈도가 점점 줄어든다.


서열이 바뀌기 전에 침팬지들이 이에룬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모습들이 자주 포착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라윗이 세력을 바꿀 준비를 했다. 이에룬 근처에서 자주 과시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72일 동안 약 5차례의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하였고 결국 라윗이 집단의 리더를 차지하게 되고 이에룬이 2위로 물러나게 된다. 라윗이 이에룬에 비해 신체적 능력이 더 좋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서열을 바꾸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바로 서열은 힘의 차이가 아닌 사회적 관계의 차이로 결정된다는 점이었다.


초반에는 라윗이 이에룬을 공격하는 행동을 보이면, 집단의 다른 암컷 침팬지들이 이에룬을 도왔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고, 오히려 쫓겨나거나 도망쳐야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라윗은 서열 꾸준히 이에룬과 암컷 침팬지들의 사이를 방해를 하는 전략을 이용했다. 이에룬이 암컷들과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떻게든 둘을 떨어트리려고 했으며, 지속적으로 암컷들을 괴롭히며 이에룬이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며 이에룬을 고립시켰다. 이 와중에 니키가 간접적으로 라윗을 지지하여 도와준다. 이에룬과 라윗이 싸우고 있을 때 니키가 직접 암컷 침팬지들을 공격하며 암컷 침팬지들이 이에룬을 신경 쓰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라윗과 니키의 연합은 이에룬을 고립시키게 되었다. 그렇게 암컷 침팬지들의 관심이 이에룬에서 라윗으로 넘어가며 라윗이 리더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니키가 성인 침팬지가 되자 상황은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니키와 이에룬이 연합을 하여 라윗을 몰아내고 니키가 서열 1위가 된 것이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이며 매일매일 요동치는 삼각관계 속에서 서열이 두 차례나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위에 언급한 키워드와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나온다. 이후에는 단디라는 수컷 침팬지도 등장하며 서열이 바뀐다. 새로운 수컷 침팬지의 등장 및 성체 침팬지로의 성장은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역할을 해내는 듯하다.


인간과 침팬지의 다른 점은?

책은 침팬지의 정치적인 행동에 대해 동물행동학자답게 객관적으로 침팬지의 행동을 기록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점이 더욱 놀랍게 만들었다. 지능 차이를 제외하면 정치적인 능력에서 인간과 다른 점이 무엇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합리적인 전략을 바탕으로 연합을 하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며, 동정을 이끌어내기도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표현 방식만 다를 뿐 인간인 나와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니 침팬지가 진화론적으로 먼저 있었으니 인간이 침팬지와 비슷하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겠다. 애초에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 자체가 인간 이전에 정치가 있었다고 하니, 책에서 다른 점을 얻기는 어려워 보였다.

chat gpt에게 침팬지와 인간의 정치적 능력 차이에 대해 물어보니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었다.

인간과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법, 제도, 이념 같은 추상적인 정치 체계를 만들었지만, 침팬지는 더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다툰다는 점이에요. 어쩌면 정치적인 능력 자체는 인간과 침팬지가 비슷하고, 인간은 그걸 더 복잡하게 발전시킨 것뿐일지도 모르겠네요.

정말로 차이가 없는 것인지 더 물어보니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었다.

침팬지의 정치는 "지금 당장 누가 이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인간의 정치는 "어떻게 시스템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인가?"까지 포함하는 차이가 있는 거죠.

이것도 크게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인데, 그 이유는 집단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스템을 만들었을 뿐, 정치라는 활동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한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침팬지라면

질문을 바꿔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가 침팬지 집단에 있는 수컷 침팬지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내가 수컷 침팬지들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서 암컷들의 지지를 받아 리더가 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리더의 위치가 부담스럽다면 리더 침팬지와 다른 침팬지 사이의 관계에서 어디에도 힘을 싣지 않고 균형을 맞추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해 버리고 서열의 꼴찌가 되어 서열과 영향력의 특권인 교미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그냥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싶다. 사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좋은 리더에게 어필하고 싶은 마음, 불안정한 곳보다는 안정적인 사회에 속하고 싶어 하는 마음 등 어쩌면 침팬지가 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니, 오히려 살아가는 매 순간 균형과 연합, 술수와 전략등을 끊임없이 신경 쓰는 침팬지가 나 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느껴진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을 존경했지만, 사람이 아닌 다른 종(species)에 존경심을 느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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