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과 수평의 긴장, 맞출 수 없는 표적
에리직톤의 초상 / 작가 : 이승우 /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예담) / 펴낸이 : 최순영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에리직톤은 신성을 부정하고 신들을 멸시하는 저속한 인물이며, 현실 너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배려가 전혀 없는 불경한 사람이다. 어느 날 이자는 시어리어스라는 여신이 매우 아끼는 숲으로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도끼질을 해댔다. 그 숲에는 오래된 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시어리어스 여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나무였다. 오만한 인간 에리직톤은 금기에 도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나무가 여신의 사랑을 받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설사 이 나무가 여신 자신이라고 한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겠느냐?” 일격이 가해지자 나무에 생긴 도끼 자국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주위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에리직톤을 말리고, 그 나무속에 살고 있는 님프도 경고하지만 그는 모두 무시하고 도끼질을 계속하여 결국 참나무를 고꾸라뜨렸다.
자기가 총해하는 참나무의 죽음을 알게 된 시어리어스는 분개하여 굶주림의 여신에게 그의 밥사발을 소유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굶주림의 여신은 자고 있는 에리직톤에게 곧장 가서 혈관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꿈속에서부터 에리직톤은 허기에 시달리고 꿈에서 깨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먹는 데에 사용하고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사라지지 않자 자신의 딸 마저 팔아버리고 허기를 채우려고 애쓴다. 하지만 저주는 끝나지 않고 결국 스스로 자기 팔다리를 뜯어먹다가 죽고, 그제야 여신의 복수가 끝났다.
1980년 초에 작성하기 시작해 1980년 후반에 완성된 “에리직톤의 초상”이라는 이승우 작가의 작품은 기독교를 단순히 종교 내에서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사회 참여로 풀어낸 소설이다. 1981년 당시 신학대학교를 휴학 중이던 이승우 작가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작성하는 동안 본회퍼의 신학에서 틸리히 신학의 영향하에 전개가 변화한다. 작가 스스로가 사회 참여형으로 전개를 해나갔던 것도 맞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가 문학은 창비를 중심으로 신학은 안병무, 서남동을 중심으로 사회 참여를 굉장히 요구하고 있었기에 이승우 작가도 그에 응답하여 작품을 작성했다고 한다.
내가 막 소설을 쓰기 시작하던 1980년대 초반의 우리 사회 분위기는 꽤 엄숙하고 또 엄격했다. 소설을 가지고 사회에 적극적인 기여를 해야 한다는 요청은 그 당시로서는 부당한 것은 아니었겠으나 어떤 사회적 기여에 대한 의식이 투철하지 않은 신인 작가를 주눅 들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 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크게 네 명 정도로 볼 수 있다. 신학대학 출신이지만 신학도의 길이 아닌 생계를 위한 신문기자일을 선택한 김병욱, 그의 지도교수이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목사 정교수, 정교수의 딸이며 같은 신학대학을 다니고 병욱이와 교제했던 정혜령, 혜령이 병욱과 헤어지고 교제를 한 최형석, 마지막으로 병욱과 혜령과 같은 신학대학을 다니는 동안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행동으로 보여준 신태혁. 소설은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행동하고 나아가는 상황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공통적으로 모두 기독교라는 토대 위에서 개인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준다.
우선, 작품 초반에는 본회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내용이 병욱의 기말 리포트로 제출한 논문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병욱의 입장은 본회퍼의 “비종교적 기독교”를 통해 “규범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즉, 성서적인 개념들을 세상적인 개념들로 재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용어의 해석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벗어나 세상에 적응하여 세속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의 언급 중에서, 이와 같은 적절한 비유가 있다.
술 취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 많은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해치고 있다면, 그 까닭 없이 희생되는 귀중한 생명들을 위해 술 취한 운전자 한 명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에 가깝지 않을까요?
48p
하지만 이에 대해 정교수는 행동에서 사상을 유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며 반박한다.
자넨 사상이 없는 사람도 행동을 한다는 점, 나아가 전혀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 같아. 속에 있는 것과 겉으로 표현된 것이 같지 않을 수 있네
50p
즉, 본회퍼를 옹호하는 병욱의 입장에 따라 기독교적 목적을 위해 비기독교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나타낸다.
작품의 초반부터 이런 언급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어떻게 나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유도하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의 시위와 언론통제가 만연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를 상상한다면, 냉소적이고 침묵을 유지하며 무기력한 신학도의 모습을 탈피시키기 위해 세상에 불씨를 던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작품의 후반부로 넘어가면 틸리히 신학을 기반으로 하여 내용이 전개된다. 틸리히 신학은 실존과 초월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으로, 작품에서는 신의 수직적인 관계와 인간의 수평적인 관계의 긴장을 유지해야 된다는 언급으로 등장한다. 소설의 후반부를 작업하던 당시 대한민국은 87년 체제로 전환이 되면서 군사 독재가 끝나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져 있었기에, 혼란한 상황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좋을지 모르는 불확정적 전환기적인 느낌이 강했고 이승우 작가는 해당 내용을 표현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1부의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나오며 그 전환기의 시작을 알린 것은 아닌가 싶다.
올려다보는 것만 아니라 내려다보는 것도 고통이라고 형석의 기억을 말했다. 나는 벌을 받고 있었다.
152p
정교수의 강연이 진행되는 동안 병욱이 생각하는 대목의 문장이다. 올려다보는 것은 신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종교의 초월적인 면모를 바라보는 것이고, 내려다보는 것은 인간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세속적인 인간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 해석하면, 당시에는 그 어디를 지향하더라도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직접적으로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나오며 이를 강조한다.
내게는 수직과 수평,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구별 짓는 것이 무의미하게 생각된다. 신은 인간적이지 않으면 안 되고, 인간은 신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수평은 수직을 지향하고, 수직은 수평에 의해 지지된다.
246p
그렇다면 왜 제목이 에리직톤의 초상인가? 작중에서 정부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기독교의 목사가 개입하는 사건이 있다. 이에 분노한 신태혁과 신학도들은 시위를 벌인다. 이와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인물들이 형석과 혜령, 정교수이며 각자 이 사건 이후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권력을 쥐고 나서 종교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해오던 관습이었다. 청동기 시대에 제사장이라는 권력자, 환웅과 웅녀에 대한 신화 등을 통해서도 해당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행동은 권력을 얻고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납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종의 치트키라 생각하며 헌법에서도 정교분리를 명시한 것처럼 올바른 방법은 아닌 것이다.
에리직톤의 신화를 다시 살펴보았을 때, 만약 여신이 권력자이고 그가 아끼는 참나무가 마치 그가 규정한 거대한 사회 규범이며, 에리직톤은 해당 규범을 무너뜨리려는 개인이라면, 신화에서 처럼 에리직톤을 신성을 부정하고 저속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즉,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에리직톤에 대응하면 각각은 신화 속에 갇혀 각자의 방식으로 시어리어스에 대응하는 이야기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또한, 후반부에서는 신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의 고민은 우리가 에리직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에리직톤이라는 이름으로밖에 불리지 못하는 데 있다.
245p
참고자료 : 이경민. (2024). 세속화와 실존 -1980년대 이승우 소설 연구-. 우리어문연구, 78, 131-179.
이 작품은 작가의 개인과 당시 시대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을 모두 다루고 있기에 생각할 것이 많이 있었다. 위에 작성한 글은 시대와 작가를 고려하여 학술자료를 토대로 작성하였다. 하지만 현재 나의 상황에서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우선 책을 읽을 당시 나는 전환기 속에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 상황이었으며, 성인이 된 이후 1년 ~ 2년에 한 번씩 이런 전환기에 부딪혔고 그때마다 큰 혼란을 느꼈다. 마치 작품에서 형석이 표적을 하나도 맞추지 못하는 모습과 같은 느낌이었다. 델브루케 씨가 마음속에 표적이 있어야 맞출 수 있다고 하는데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에서, 무엇이 맞는 길인지도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어떤 표적을 가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겠으니 아무 표적을 갖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종종 몇 가지 표적을 만들어보았지만 쏘고 난 이후 저게 내 표적이었을까? 혹은 정말 맞추기는 한 걸까?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을 뿐이다.
작중에서 형석은 그 나라에 있는 높은 산을 등산하고 나서 마음속에 표적이 형성된다. 하지만 짧은 희망과 다르게 다시 사격장으로 돌아와 사격을 하지만 역시나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어쩌면 표적이라는 것은 그저 바라볼 뿐이고 애초에 맞출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델브루케 씨가 표적을 잘 맞추는 것을 보고는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델브루케 씨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삶이란 총을 똑바로 쏘는 거야 똑바로
이 문장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직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일단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형석에게서 조금 더 힌트를 받고 싶었고 아래 대목에서 나의 내면에서 약간의 변화를 느꼈다.
보편주의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동기는 언제나 개인적이고 심리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고상한 이념이나 그럴듯한 명분은 개인의 욕망이나 절망, 혹은 불안 같은 것을 반영 내지 투사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상주의를 표방하거나 집단의 행복을 앞세우는 자들은 솔직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다. - 279p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에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솔직하지 못하다는 이 문장이 낭만적이며 현실을 회피하려는 나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지금껏 나의 가치관은 고상한 이념이나 그럴듯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크고 작은 결정들을 진행할 때 최종 결정은 나의 그러한 가치관을 기준으로 판단하였다. 시점은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부터 헷갈리기 시작했고, 표적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에 대한 솔직함도 사라졌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조차도 사라져 갔다.
하지만 나의 동기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에서 출발시킨다면 이제는 나의 존재를 현실에서 떼어내지 않고 당사자의 입장에서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보였다. 즉각적으로 현실에서 큰 변화가 발생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또 다른 희망을 찾고자 형석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았으나, 형석은 표적을 맞추지 못한 채 끝내 높은 산에 다시 등산하고 추락사로 발견된다. 그것이 구원이었을지 추락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구원이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