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의 개념을 빌려본 인간관계
L에게 “결이 맞는다”는 말을 들은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그때부터 ‘결’이라는 단어에 꽂혀버렸고 이후에도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할 때 말이 잘 통하거나 서로 배려하고 좋은 관계라는 확신이 들면 나도 모르게 ‘결이 맞다’ 고 표현하곤 한다.
참 좋은 표현이다. “당신과 나는 정말 잘 맞아요!”라는 말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다. 취미가 맞는지, 성격이 비슷한지, 유머코드가 통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짚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이 맞다”는 표현은 모든 요소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개성은 유지한 채로 편안한 관계가 유지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아직까지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결은 “나무줄기의 결”과 같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과 같이 동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 결을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해 보기 위해 물리학의 개념을 가져와본다. 기호로 표현 가능하고 변수를 이용해 계산까지 가능한 파동방정식이 떠오른다. “당신과 나는 결이 같아요”라는 말은 “당신의 파동과 나의 파동이 높은 확률로 보강간섭을 일으키는 것 같아요” 로 읽히기 시작한다. 심지어 파동방정식은 확률적이라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바꿔 말하면 오늘은 당신과 내가 보강간섭을 일으킬지 몰라도 내일은 충분히 상쇄간섭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친하게 지내던 사람과 내일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포함된 개념이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사람의 경우, 만나는 짧은 시간 내에서 서로의 파동 중첩을 판단하게 된다. 절반 이상의 시간에서 보강간섭이 느껴진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자주 연락하고 싶어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만약 만났던 그 당시에 우연히 상대방과 나의 관심사가 같아 파동이 비슷하게 형성되었다면, 우연히 보강간섭이 자주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즉, 과학적으로 데이터 셋이 너무 작아 유의미한 비교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과 나는 잘 맞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추가적인 데이터셋으로 검증을 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반대로 자주 만나는 사람의 경우, 지금까지 서로 잘 맞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왜 안 맞는 것 같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때가 되면 나와 상대방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처음에는 나의 파동을 분석하고 다음에는 상대방의 파동을 분석한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디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서로 맞지 않는 파동은 아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충분히 많은 데이터로 좋은 관계라는 검증이 되었으며, 한 번 발생한 예외는 간단히 이상치(outlier)로 넘기면 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방정식 전체를 뜯어본다.
참 아이러니하다. 검증이 안된 관계에서는 확신이 생기고, 검증이 된 관계에서는 의심이 생기니 말이다. 어쩌면 결이라는 개념은 확률이라는 변수와 독립적이지 않을까 싶다.
과연 내가 느끼는 보강간섭이 상대방에게도 똑같이 느껴질까? 세상이 모두 같은 좌표축에서 형성이 되었다면 상대와 내가 느끼는 감정은 모두 같은 양으로 계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과 나는 세상이라는 좌표축 위에서 각자의 독립된 좌표축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나의 좌표 위에서 만들어진 파동방정식은 상대방의 세계에서는 틀어지기 마련이다. 나의 세계에 들어온 상대방의 파동방정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때 우리는 정규화(normalization)를 시도한다. 상대방의 모습을 분석하고, 나의 세계에 들어온 상대방의 파동을 분석해 그에 맞춰 나의 파동방정식을 조금씩 손보는 것이다. (상대방이 슬픈 일이 있는데 내가 기쁜 일이 있다고 무턱대고 기뻤던 순간에 대해서 주절주절 떠들어 댈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정규화를 열심히 진행해도 상대방의 좌표축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오차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내가 느끼는 보강간섭의 크기가 상대방이 느끼는 보강간섭의 크기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종종 상대방과 내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동시에 잘 맞는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 힘을 들여 정규화를 진행하지 않아도 편안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이라는 개념은 파동뿐만 아니라 좌표축 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은 아닐까 싶다.
결을 설명하기 위해 파동 방정식, 정규화, 좌표축 등의 개념을 가져와 보았지만, 그 끝에서 나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결은 정말 분석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분석을 거부하는 개념일까.
파동이 어긋나더라도 편안한, 좌표축이 달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관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결이 비슷한 사람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