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산 16
대둔산에서의 여러 광경 중 금강구름다리와
그 뒤의 삼선계단과 또 뒤로 높게 마천대를 중심으로 한
주변 기암 일대는 최고의 가경이다. 단풍 물든 가을이 아니어도
여전히 멋지고 아름다운 절경을 보여준다.
전북 완주군과 충남 논산시, 금산군에 접한 대둔산大芚山은 6km에 걸쳐 수많은 암봉이 수려하게 이어져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며, 1977년에 전북과 1980년 충남에서 각각 도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있다.
인적이 드문 벽산 두메산골의 험준하고 큰 산봉우리를 의미하는 산 이름을 지녔어도 가을 단풍의 절경과 수려한 산세에 산장, 구름다리, 케이블카 등의 관광시설을 갖추어 많은 이들로부터 듬뿍 사랑받는 산이다.
대둔산 가까이 있는 배티재(해발 349m)에서 잠시 내린다. ‘임란 순국 무명 사백 의병비’라고 쓴 석비가 세워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의 이치 대첩과 관련된 곳이라고 들은 바 있다. 이치梨峙는 순우리말 배티재의 한자어이다. 임진년 7월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군이 군량미 현지 보급을 위해 2만 병력을 동원하여 이 배티재를 넘어 호남평야로 진출하려 했을 때 권율 장군은 1500명의 병력으로 결사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일컬어 이치 대첩이라 한다.
땀이 배고 현기증 이는 기암 절경
배티재에서 오밀조밀 모여선 우람한 칠성봉을 바라보고는 조금 더 지나 대둔산 도립공원 주차장에 종착하자 관광버스가 빼곡하다.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가를 따라 걷는데 기름에서 막 빼낸 인삼 튀김이 군침을 돌게 한다.
눈 예보가 있어 대둔산에서의 첫눈 산행을 기대하고 왔지만, 눈은 뿌리다 말았다. 정상 쪽만 하얗게 눈가루를 얹고 있을 뿐 내린 눈이 녹아 축축하게 젖어있다. 나뭇가지만 앙상한 초겨울 대둔산 진입로는 산객들마저 뜸해 스산한 분위기다.
케이블카 탑승장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손님들 여럿이 줄을 서서 대기 중이다. 곧이어 크고 높다랗게 자연석을 세운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를 보게 된다.
대둔산 일대는 역사적으로 싸움터가 많다. 골 깊고 거친 바위산에 울창한 숲을 품고 있어 더욱 그러한 건도 모르겠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투항을 거부한 동학 교도들이 이 산으로 피신하여 요새를 만들고 3개월여 왜병과 치열한 항전을 벌이다가 1895년 2월 18일 전원이 순국하였다.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2001년에 세운 돌비석을 지나면 깔끔하게 단장된 돌계단이 이어진다. 그러나 잠깐뿐이다. 급격히 기울어진 너덜 돌길이 나타나면서 본격 산행로가 시작된다. 크고 작은 모난 바위들이 널브러진 돌밭을 급하게 올라 동심바위를 보며 숨을 고른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이 바위를 보고 발이 떨어지지 않아 사흘을 머물렀다고 한다. 특이하게 생긴 바위이긴 하지만 바쁜 원효대사가 왜 사흘씩이나 바위를 떠나지 않았는지 궁금해진다. 동심바위를 지나서도 금강문으로 오르는 돌길은 호되게 가파르다.
금강구름다리에 근접하면서 멋진 기암들이 시선을 붙든다. 대둔산에서의 여러 광경 중 금강구름다리와 그 뒤의 삼선계단과 또 뒤로 높게 마천대를 중심으로 한 주변 기암 일대는 최고의 가경이다. 희끗희끗하게 첫눈의 흔적을 담고 꼿꼿이 상체를 편 모습이다. 단풍 물든 가을이 아니어도 여전히 멋지고 아름다운 절경을 보여준다.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잇는 금강구름다리는 길이 50m, 높이 81m의 철교로 양쪽 기암 봉우리에 걸쳐 있어 위에서 보기엔 공중그네처럼 아슬아슬해 보인다. 금강구름다리를 건너다보면 장군바위의 위용이 먼저 눈에 잡힌다. 늠름한 기품으로 망토를 휘감고 세상을 꿰뚫듯 응시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129개의 삼선계단, 금강구름다리를 지나 삼선계단으로 오르려면 먼저 급경사의 험한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길까지 좁아 진행이 수월치 않다. 대둔산은 삼선계단에서 탐방객들의 긴장감을 고조시켜 박동을 크게 울리게끔 하는데 51도의 기울기를 막상 오르려면 그보다 훨씬 급한 경사처럼 느껴진다. 일시 최대 통과 인원이 60명이라지만 지금은 겨우 예닐곱 명이 건너는 중이다.
철제 난간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놓치면 떨어질세라 땀까지 밴다. 슬쩍 고개 돌려 뒤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인다.
금강구름다리와 산등성이 아래로 보이는 마을과 그 뒤로 다시 솟은 마루금들을 보면 아무리 손이 떨려도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동심바위가 눈에 들어오자 원효대사가 길게 머문 이유를 어렴풋 알 것도 같다. 바위 위에 걸터앉으며 저절로 수행이 되고 득도의 경지에 이를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가을철 오색단풍이 한껏 물든 풍광과 달리 이파리 떨쳐낸 나목들로 더더욱 몸집 드러내며 거침없이 솟구친 바위 봉우리들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어 계단은 더욱 길어진다.
계단을 벗어나 상부에 이르면 기암 준봉들은 더더욱 뚜렷한 선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삼선계단 우회도로와 합류하며 돌길을 올라 용문골 삼거리에서 대둔산 정상인 마천대(해발 878m)에 이른다.
정상석 없이 인공조형물인 개척탑이 높이 세워져 있다. 항상 사람이 많이 모이는 정상 중 한 곳이 여기 마천대인데 오늘은 번잡할 정도는 아니다. 이 개척 탑은 1972년 4월에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세웠다고 표기되어 있다.
계단을 내려와 낙조대 쪽으로 하산 길을 잡는다. 예전에 태고사 쪽에서 올라와 낙조대와 낙조 산장의 운치 있는 풍광이 떠올라 예정보다 조금 더 행로를 늘렸다. 역시 멀리서 보는 낙조 산장은 한적한 중에도 낭만이 넘친다. 낙조대(해발 855m)에서 계룡산과 서대산 쪽의 마루금을 살펴보고 지나온 마천대를 돌아본다.
“갈 데가 많아 여기 다시 오기는 힘들겠지?”
“그럴 리가요. 어느 순간 문득 삼선 다리가 아른거리겠지요. 그럼 여기 와있을 겁니다. 그때가 여름이든 가을이든 간에요.”
최고봉에 작별 인사하고 내리막을 천천히 걸어 용문굴을 살펴본다. 용이 승천하면서 만들어진 길답게 바위가 신비롭게 갈라져 있다. 용문굴을 지나 칠성봉 전망대에 이르러서도 대둔산은 구석구석 속살을 낱낱이 보여준다. 둘러볼수록 다시 또 오겠노라고 마음을 다지게 하는 곳이다. 다시 가파른 내리막으로 신선암을 지나 용문골로 내려선다. 마천대에서 2.2km의 거리에 있는 날머리에 다다른 것이다.
큰 도로를 10여 분 천천히 걷는데 조금씩 눈이 뿌리기 시작한다. 도립공원 주차장으로 걷는 걸음이 산행을 마쳤는데도 한결 가볍다.
때 / 초겨울
곳 / 대둔산 탐방안내소 - 케이블카 탑승장 - 구름다리 - 삼선계단 - 마천대 - 능선 삼거리 - 낙조 산장 - 낙조대 - 용문굴 - 칠성봉 전망대 - 신선암 - 용문골 - 원점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