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산 15
신비로운 햇살, 화려한 비상만 쫓았다면 어찌 우리
함께 할 수 있었겠나. 안개비 축축한 오늘 현기증 노랗게
일으키는 건 새벽어둠 저만치 밀치고 달려와
여기 덕유의 향에 한껏 섞이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덕유산, 백두대간이 남하하며 속리산을 지나 추풍령을 거쳐 숱한 고산준령을 빚어놓고 지리산으로 넘어가는 곳.
3년 전 겨울, 온통 하얗게 덮였을 거라서, 햇살까지 눈부시게 그 눈밭에 부서질 게 틀림없어서, 너른 주목에 얹혔다가 엷은 바람에 희게 흩날렸던 미세함이 눈에 밟혀 산행 전부터 가슴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전북 무주군은 방문 관광객들에게 군내 수많은 관광명소를 소개하고 구체화한 관광 정보를 제공하고자 무주읍 9경, 무풍면 8경, 설천면 38경, 적상면 26경, 안성면 11경, 부남면 8경 등 무주 100경을 선정하였다. 그만큼 명승 관광지가 많다는 방증이다.
무주군과 장수군,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에 걸쳐 장중하게 펼쳐진 덕유산을 3년 만에 다시 찾는다. 두 달 전 지리산 화대 종주 멤버들과의 약속된 일정이다. 설악산 서북 능선 종주, 지리산 화대 종주와 함께 우리나라 산악 3대 종주에 속하는 덕유산 욕구 종주. 올 한 해에 3대 종주를 모두 실행하는 병소, 계원, 은수의 산행 리더로 함께한다는 것이 가슴 벅차고 책임감 또한 작지 않다.
육십령에서 구천동까지, 3년 전 영각사에서 남덕유산으로 올라 덕유산 향적봉에서 백련사로 내려갈 때보다 약 18km를 더 걷게 된다. 장거리 종주 산행을 할라치면 늘 그랬듯 속을 모아 깊은 기도를 올린다.
“하나님! 우리가 원해서 온 곳입니다. 우리가 원한 그대로 이 산에 녹여질 수 있게 하소서. 저와 제가 사랑하는 친구, 그리고 또 사랑하는 두 후배가 평생 이 산을 그리워할 수 있도록 이 산이 우릴 사랑하게 하소서. 이번 종주가 이후 우리 살아감에 큰 교훈되게 하소서.”
출발지 육십령부터 길을 놓치다
덕이 많고 너그러워 덕유德裕라 칭하게 된 산에 덕이 많은 친구, 후배들과 함께 왔다. 서울에서 오후 4시 반경에 출발, 밤 8시경 육십령 휴게소에 도착. 늦가을 추위에 떨지 않고 휴게소 매점 내에서 고기를 구워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이들과 육구 종주를 하는 이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 여기 육십령 휴게소이다.
KBS TV 모 프로그램에서 방영했다는 사진이 벽면에 걸려있다. 너무나 친절하여 감동한 산객들이 추천해서 방송을 탔나 보다. MBC나 SBS 다른 지상파 방송에서도 소개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안한 곳이다.
육십령, 너무 험하고 으슥해 도적의 무리가 하도 많아 나그네 60명 이상이 모인 다음에야 함께 지났다는 곳.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국경의 요새지로서 성터와 봉화대 자리가 지금도 남아있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와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의 두 주소가 겹치는 곳이 바로 이 지점,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지역이다.
“우리 네 명이면 육십 명 몫을 해낼 거야. 출발하세.”
헤드 랜턴, 스틱을 재정비하고 예정대로 밤 11시 정각에 여기서 육구 종주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휴게소를 나와 산행 시작 후 30여 분을 걷는데 채석장이 나오는가 싶더니 더 이상 갈 길이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 나와 살펴보았는데 등산로 입구 표지판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첫걸음부터 1시간, 약 4km를 알바로 허비한 셈이다.
할미봉 오르는 길의 이정표도 모두 찢어져 방향과 거리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이 부근에서도 길을 잘못 들어 30여 분간 헤맨다. 낭떠러지가 있는 고개 끝부분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야 꼭꼭 숨어있는 등산로를 겨우 찾았다.
“저거, 친구만 아니면 진작 잘라야 하는 건데.”
“어째 쉰여섯 명이 더 모이면 출발하고 싶더라니까요.”
“후유~ 담부턴 산행 대장 안 할래.”
일행들에게 미안해 죽겠는데 그들은 여유로운 농담과 웃음으로 맘을 편케 해준다. 초행길인지라 종주 구간을 더욱 세밀히 살폈는데도 거푸 길을 놓치고 말았다. 낮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길일 텐데 힘들게 할미봉(해발 1026m)에 도착했다. 할미봉은 할머니처럼 구부정한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어원상 ‘할’은 크거나 많다는 뜻의 ‘한’과 산의 우리말인 뫼가 ‘미’로 변화한즉 큰 산을 이르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할미꽃에 대한 설화가 이 봉우리에서 전해진다.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손에 키워진 두 손녀가 성장하여 시집을 갔다. 손녀들을 그리워하던 할머니가 작은 손녀를 만나보고, 더 멀리 시집간 맏손녀를 만나러 깊은 산을 넘다가 지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 이듬해 할머니가 죽은 자리에서 할머니를 빼닮은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이 그 꽃을 할미꽃이라 불렀다.
“할머니가 보고 싶어 찾아가기 전에 손녀들이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시집살이가 만만치 않았던 게지.”
할미봉에서 서봉을 향하다 보면 비스듬히 하늘을 향해 곧추세워진 바위가 있는데 대포바위라고 명명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전주성을 치기 위해 함양을 거쳐 육십령을 넘어와 고갯마루에서 할미봉 중턱을 바라보았더니 엄청나게 큰 대포가 서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오던 길을 되돌아 남원 쪽으로 선회함으로써 장계 지역이 화를 면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대포처럼 보여 대포바위라 부르지만 실상 가까이에서 보면 남자의 성기와 흡사한 모양이라 남근석이라고 부른단다.
일설에 의하면 사내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들이 이 바위에 절을 하고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소원을 빌면 사내아이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단다.
“예전엔 잘 나갔던 바위구먼.”
“요즘엔 딸 갖는 게 대세니까 호시절 다 지났지 뭐.”
가겠다는 의지를 다졌을 때 길을 열어주는 곳이 산
할미봉을 어느 정도 지나면서 서봉으로 가는 길이 거칠고 힘들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위벽 밧줄 구간의 연속이다. 아득한 밧줄 하강 길을 내려가야 하는 건지, 또 알바를 하는 건 아닌지 자꾸 망설여진다. 깜깜한 어둠길이고 손이 곱을 정도의 추위 때문에 내려다볼수록 아찔하고 위험천만하다.
“뒤죽박죽 길 엉켜놓고 밧줄 저만치 늘어뜨려 우릴 겁 주려 해도 우린 가야 하네.”
왜냐하면, 난 내 사랑하는 일행들에게 얘기했거든. 무룡산에서 꿈틀거리다 춤추며 솟아오르는 여의주 옹골지게 문 용을 보여주기로 했고, 향적봉에서 물씬 풍기는 인자의 덕 내음을 맡게 해 주기로 말일세. 그리고 여기 덕유산은 우리가 거쳐 지나야 할 수많은 행로의 중간 거점에 불과하단 걸 명심하시게. 그러니 이는 바람 그만 잠재우고 심술궂게 흐르는 안개도 거둬주시게.
“날 세워 잔뜩 찌푸린 미간 펴고 우리와 맞서려 하지 말란 말일세. 우린 결코 멈출 수 없거든.”
만용을 부리는 게 아니라면 가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졌을 때 길을 열어주는 곳이 산이다. 절실함과 열정이 전제되었을 때 목표를 당겨주는 삶과 다르지 않다.
다소간의 고비를 극복해내며 경상남도 덕유산 교육원으로 갈라지는 덕유 삼자봉에 이른다. 육십령에서 4km, 할미봉에서 1.8km를 온 지점이다. 표지판에 적힌 걸 보고야 알았지만, 할미봉을 한참 지나 서봉 구간부터가 국립공원 지역이란다. 육십령부터 할미봉을 지나 교육원 삼거리까지는 덕유산 국립공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정표도 쓰러지고 찢어지고 엉망이었구나.”
그렇게 핑계는 댔지만 산행리더가 그런 정보도 미리 파악하지 못하고 산행에 임했다는 것이 자책된다. 겨우 서봉(해발 1492m)에 다다랐을 뿐이다. 지금은 지난 실수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짙은 안개가 빠르고 습하게 흐른다. 더욱 조심해서 안전하게 전진하는 게 중요하다. 장수 덕유산이라고도 하는 서봉에서도 곧바로 이동한다.
철 계단을 따라 내려선 후 황새 늦은 목이 능선을 따라 올라간다. 기백산, 금원산, 거망산, 황석산의 마루금이 가까이 있을 것이고 지리산 주릉도 멀지 않을 텐데 그저 어둠만 뚫고 지날 뿐이다. 그렇게 흑암 속에서 시행착오와 자책을 곁들인 고생 끝에 남덕유산(해발 1507m)까지 왔다.
남덕유산은 향적봉에 이은 덕유산의 제2봉으로 낮에는 장쾌하고도 호방함이 돋보인다. 이곳 남덕유산에서 지금부터 가게 될 향적봉까지 주 능선을 따라 부드럽고 넉넉한 산세에 푸근하게 안겨 걷노라면 남쪽으로 지리산 그리고 가야산으로 연결되는 숱한 봉우리들의 비경을 속속 접하게 된다.
“날씨만 말끔히 갠다면.”
지금 잔뜩 찌푸린 기상이 은근한 불안감으로 엄습한다. 남덕유산에서 갈라져 스르르 진양 기맥이 흘러내리는데 월봉산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금원산과 기백산을 거쳐 진양호의 남강댐에서 그 맥을 담그는 약 159km의 산줄기를 조망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라떼는 말이지.”
현성산 우측으로 황석산과 거망산을 가리키며 일행들에게 무용담을 늘어놓을 수 없는 것도 서운하다. 이러한 조망까지 곁들여 서해의 습한 대기가 산을 넘으면서 뿌리는 많은 눈 때문에 겨울철 산객들에게 호감을 주는 남덕유산이지만 3년 전 겨울에도 그랬던 것처럼 정상 지대는 세찬 칼바람이 몰아쳐 잠시도 머물 수가 없다.
첩첩산중 장쾌하게 이어진 연봉들이 눈가루를 흩날리며 연출하는 설경이 아른거리자 더욱 추워져서 얼른 100m 아래 삼거리로 회귀한다.
황점마을로 내려서는 삼거리 월성치부터 굽이굽이 령과 재가 반복되지만 여기서부터 덕유산 주능선이라 지금까지 온 것보다는 훨씬 수월할 것이다. 16km에 이르는 덕유산 주 능선에는 1000m 이하로 낮아지는 구간이 없으니까. 단지 몰려오는 졸음이 변수다.
힘들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텐데 옆길 300m 거리의 삿갓봉(해발 1418.6m)을 굳이 들르고야 만다. 천자문에 왜 하늘을 검다玄고 했는가. 어둠으로부터 세상은 그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리라.
더부룩 깔린 구름 솎아내고 붉게 햇살 펼쳐지면 동이 터오는 걸 의식하겠건만, 산이 깨어나는 소리 듣고 싶어 한밤중에 산을 올랐건만 산은 함부로 그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가 보다. 일품의 일출 광경을 볼 수 있는 삿갓봉이지만 가랑비를 동반한 습한 운무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덕유산의 멋진 산그리메를 보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동으로 겹겹 산줄기들이 중첩되는 장대함과 남으로는 횡으로 펼쳐진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는 게 덕유산에서의 큰 볼거리인데 말이다. 덕유산이 초행인 일행 세 사람에게 마치 내 탓으로 인해 보여주지 못한 기분이 든다.
덕유산 능선은 노고단에서 뻗은 지리산 주 능선, 설악산 서북릉, 소백산 주 능선과 함께 남한 땅을 대표하는 장쾌한 능선이다. 그 능선, 우리가 걷는 저 앞길마저 자욱하게 가려져 있는 게 괜한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금세 털어내 버린다. 먼 행로에 더 무거워질 수 없으므로.
신비로운 햇살, 화려한 비상만 쫓았다면 어찌 우리 서로가 함께할 수 있었겠나. 안개비 축축한 오늘 현기증 노랗게 일으키는 건 새벽어둠 저만치 밀치고 달려와 여기 덕유의 향에 한껏 섞이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여기 길게 내다보지 못하고 오래 머물지 못할지라도 오늘 그대들과 보냄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 느끼고자 하네.
삿갓재 대피소에서는 가까운 봉우리들이 뿌옇게나마 모습을 드러낸다. 무룡산 가는 길 서편으로 운장산, 장안산, 대둔산 등의 산군일 것이다. 시야에 잡히는 무리를 헤아리려는데 안개는 보여줄 것처럼 살짝 치마를 올리는 듯하더니 그예 내려버린다. 멋지고 아름다운 건 한 번에 다 보여주지 않는가 보다.
산과 산안개처럼 진정한 사랑과 우정 또한 살짝 가리어질 때 더 빛나는 건 아닐까. 도드라지면서 녹이 생기고 금이 간다면 그렇게 진하게 엮이고 싶지 않은 게 사랑과 우정 같은 게 아닐까. 목부터 꼬리까지 이어지는 중첩 마루금을 기대했지만 그예 보지 못하고 걸음을 옮긴다. 알아듣기 힘든 궤변을 웅얼거리며.
아무도 없어서 좋다. 대피소 취사장 복도에 자리를 펼치고 우리끼리만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치고 대피소 지하에 기대 잠시 눈을 붙이려 했지만, 추위 때문에 변변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다시 길을 청한다.
습한 운무가 결국 비로 변했다
기체가 액체로 서서히 변하는 액화 현상을 체험하며 무룡산에 도착했다.
“상 찡그리지 말고 웃어.”
1491.9m라고 표기된 무룡산舞龍山, 정상석 앞에 축축한 모습으로 섰어도 카메라 앞에서 웃는 모습은 산사나이답고 싱그럽다.
구름이 되려는가, 하늘이 되려는가. 아래로 깔려 운해가 되어야 할 안개가 짙은 운무 되어 끝도 없이 오르려 하다가는 결국 우정의 높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앉더니 아래로 미끄러진다.
“짜식, 넘볼 걸 넘봐야지.”
등성이를 타고 피어오르는 운무 속에서 춤추며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연상만 하고 무룡산을 떠난다. 빗방울이 더욱 거세진다. 1500m 고지에서 맞는 가을비는 몹시 차갑다. 그래서 걸음도 빨라지기 시작한다. 4.2km를 단숨에 걸어오니 동엽령이다. 바로 백암봉으로 향한다.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육십령을 거쳐 뻗친 백두대간은 여기 백암봉에서 오른쪽 송계사 방면으로 꺾어진다.
“강행군이구먼.”
“화대 종주 때보다 더 힘든데요.”
“날씨 탓이죠.”
대간을 낀 덕유산의 능선과 골들은 그 경관이 수려하고 호방해서 눈을 뗄 수 없는 대하드라마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자주 쉬며 드라마에 심취하곤 했었는데 오늘은 쉴 곳조차 마땅치 않다. 길이 수월한 편이기도 하지만 쉴만한 곳, 구경할만한 장면이 없어 주 능선에 올라와서는 비교적 빠르게 온 편이다.
“비가 그쳤어요.”
졸음도 쫓고 걸음 탄력도 받을 겸 곧바로 중봉으로 향하려는데 어느새 비가 그치면서 아주 천천히 중첩된 산들의 형체가 뿌옇게 드러난다.
“오늘의 태양이 이제라도 떴으면 좋겠건만.”
중봉을 지나 정상 향적봉까지의 1km 구간 사이에는 원추리 군락과 구상나무숲, 덕유평전이 볼만한 곳이다. 봄철 덕유산은 철쭉꽃밭에서 해가 떠 철쭉꽃밭에서 해가 진다는 말이 있다. 향적봉에서 남덕유산 육십령까지 이어지는 능선에 펼쳐진 철쭉군락들이 겨울이면 온통 상고대와 눈꽃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철쭉이든 눈꽃이든 덕유평전이 가장 화려하건만 오늘은 그마저도 눈길 주지 않고 향적봉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바삐 통과한다. 비에 젖어 축축한 고사목들이 온기마저 빠져나가 금세라도 휘어지고 꺾어질 것만 같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은 유일하게 1600m대 고지의 산이다. 해발 1614m의 향적봉, 세 해가 지나 다시 찾은 향적봉. 그해 겨울엔 엄동설한에 동상이 걸릴 만큼 추웠는데 지금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젖은 옷차림에 몸을 움츠리며 정상에 섰다.
덕유산은 한반도 남부의 한 복판을 남북으로 꿰찬 군사적 자연 장벽이자 영호남을 가르는 장벽 가운데서도 가장 험한 경계선 중 하나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신라와 백제가 각축을 벌이던 국경선,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있는 곳이니 그럴 법도 하다.
아마도 중봉이 최종적으로 향적봉을 사수하려는 백제와 신라 양측 최고도의 군사 분계선쯤 되지 않았을까. 산꼭대기에서까지 얼굴 붉혀가며 아군 적군 따지지는 않았을 성싶다.
“야, 문디자슥아, 밥 묵었나?”
“거시기해서 잔뜩 배 채웠당께.”
입가에 웃음 머금고 덕유산 전경의 사진판을 들여다보니 북으로 가깝게 적상산이 있고 멀리 황악산, 계룡산이 흐릿하게 솟아있으며 서쪽으로 운장산, 대둔산, 남쪽으로는 오늘 우리가 들머리로 삼은 남덕유산이 있다. 지리산 반야봉과 동쪽으로 가야산, 금오산들이 장대하게 연출하는 산그리메를 오늘은 머릿속으로만 그려본다.
덕이 많아 한없이 너그러워
덕유德裕라 명명했다지.
이만큼 높이 올라서도 향 풀풀 내뿜으니
향적香積이라 불린다지.
배움이 귀히 여겨지려면
가슴 깊이 덕과 어우러져야.
연륜이 가치를 지니려면
지나온 경험에서 향이 풍겨야.
허나 그런 깨우침이 억지로 되는 일이던가.
깨우치려는 의식조차 떨쳐버리지 못해 오히려
부질없는 욕심으로 드러나는 게 우리네 삶
늘 고개 숙이면 적어도 천정에
이마 찢는 불상사는 없으리니
세상에 낮은 것은 오로지 저 스스로뿐
그저 땀 젖은 육신 씻어 만족스러우면
그 자체가 득도 아니겠나.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고 하기에는 그 길이 만만치 않다
“케이블카가 자꾸 눈에 들어오네요.”
설천봉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으면 하는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못 들은 척 설천봉에서 눈을 돌린다.
“걸어 내려가게나.”
오히려 바로 지척에 세워진 운송 시설물로 크게 위상을 깎인 향적봉이 버럭 소리 지르는 것만 같아 얼른 백련사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조선 명종 때의 문장가 임훈은 덕유산 풍광에 반하여 53세에 덕유산을 올라 무려 3000자에 달하는 장문의 ‘향적봉 기香積峯記’를 남겼다고 한다. 얼마나 장엄하고 멋진 산인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덕유산은 북동쪽 칠봉 산록에 대규모 국제야영대회를 치를 수 있는 청소년 야영장과 자연학습장인 덕유대德裕臺, 산자락에 길게 스키장 등을 설치하였다.
겨울철이면 눈이 많이 내리는 지리적 기후특성으로 인해 1990년 덕유산 자락에 건설된 무주리조트는 700만㎡에 이르는 초대형 산악 휴양지로 1997년에는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국내에서 가장 긴 6.1㎞의 실크로드 슬로프와 37°에 달하는 급경사의 레이더스 슬로프가 있다.
“산은 특히 국립공원은 자연을 보전하는 게 최우선적 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맞아.”
“케이블카가 설치되었으니 저 아래엔 호텔과 레스토랑이 들어설 거고 그러면 유흥가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지요.”
일행들의 생각이 같다. 이렇게나 수려한 계곡과 파도처럼 굽이치는 고봉들로 명성 자자한 덕유산에 무주리조트 스키장이 주봉까지 치고 올라왔다는 건 치명적인 실책이라는 생각을 접을 수 없다. 등산객들과 관광 인파가 뒤섞여 하산 곤돌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게 천년을 거슬러 일찌감치 대자연을 훼손한 거란 느낌에 찜찜하기 짝이 없다.
가뜩이나 지리산 화대 종주나 설악산 서북 능선 종주 때와 달리 막바지에 만끽한 희열이 부족한 산행이었는데 찜찜함까지 담고 내려가기가 싫어 편의시설에서 등을 돌리고 만다.
산이 천하 비경의 심산유곡으로 전혀 오염이 되지 않았을 때도 누군가에게 산은 그저 먹을 것을 챙겨주는 수단에 불과했었다. 화전민은 물론이고 심마니나 사냥꾼들에게 산은 그저 생계를 해결하는 터전에 그쳤던 곳이다. 산만큼은 절대 부르주아bourgeois의 이해타산이 넘나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행히 내리막길이 미끄럽지 않다. 덕유산 여덟 계곡 중 설천에서 발원한 28㎞ 길이의 무주구천동계곡은 덕유산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경승지로 폭포, 담, 소, 기암절벽, 여울 등이 곳곳에 숨어 구천동 33경을 이룬다고 한다. 그중 몇 곳이 하산 길에 있다.
데크와 계단 등으로 길을 잘 다듬어놓아 예상보다 어렵지 않게 내려왔다. 빛깔 고운 단풍은 백련사에 와서야 겨우 볼 수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백련사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가 전쟁 후 새로 지었다는데 9천 명의 성불 공자成佛功者가 살고 있어 구천둔이라 불리다가 지금의 지명인 구천동으로 바뀌었다는 유래에서처럼 불교가 성행했던 덕유산의 중심 사찰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날머리 구천동 삼공 탐방안내소에 이르자 그제야 가을이 고여 있는 걸 보게 된다. 아직 물 빠지지 않은 단풍나무 밑에 서서 서로에게 안산 완주를 축하하며 악수하는데 꽉 쥔 손마다 온기가 그득하다.
“날 좋을 때 다시 오자.”
비 오면 비 맞는 그대로, 폭설에 발 빠지면 또 그러한 대로 산은 지나오면 값진 의미이자 귀한 흔적이다. 어스름 물드는 구천동의 해거름이 비 온 뒤라 그런지 더욱 곱다.
때 / 늦가을
곳 / 육십령 - 할미봉 - 서봉 - 남덕유산 - 월성재 - 삿갓봉 – 삿갓재 대피소 - 무룡산 - 동엽령 - 송계 삼거리 - 백암봉 - 중봉 - 향적봉 - 백련사 - 구천동 상공 탐방안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