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산 23
사람도 연꽃처럼 활짝 핀 듯한 성숙함을 느낄 수 있는
인품의 소유자가 있다. 이런 사람과 대화하면
은연중에 눈이 열리고 마음이 맑아진다.
이런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경상남도의 중앙 남부에 위치한 고성군은 동으로 창원시, 서로 사천시와 접하고 남으로 통영시, 남해의 한려수도와 접해있다. 연화산으로 향하기 전에 아침 일찍 상리 연꽃공원과 상족암을 먼저 들러보기로 하고 부지런히 움직인다.
수련 밭을 가르는 징검 돌다리를 건너면서 남쪽 나라의 정취에 빠져보고, 정자에서 연꽃 무리를 내려다보며 성숙 청정成熟淸淨의 고매함을 익혀본다.
‘활짝 핀 연꽃을 보면 마음과 몸이 맑아지고 포근해짐을 느낀다. 사람도 연꽃처럼 활짝 핀 듯한 성숙함을 느낄 수 있는 인품의 소유자가 있다. 이런 사람과 대화하면 은연중에 눈이 열리고 마음이 맑아진다. 이런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성숙 청정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을 테니 이런 사람을 만나는 수밖에…….”
적힌 팻말 글을 읽으며 부끄러움과 함께 한 수 깨우침을 받고 인근 상족암으로 장소를 옮긴다. 남해안 한려수도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데다 해면의 넓은 암반과 기암절벽이 계곡을 형성하여 청정하고도 수려하다.
1983년 고성군은 천혜의 석보 상족암과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 보존 가치가 있는 이 지역을 군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멀리 희미하게 수미도가 떠 있고 그보다 앞으로 지리산이 있는 사량도가 보인다.
무수히 널려있는 공룡 발자국을 보니 그 덩치가 가늠되고도 남는다. 데크를 걷고 물길 따라 걸으며 보게 되는 코발트 빛 바다에 다리를 담근 기암절벽은 변산의 채석강과 흡사하고 제주도 용머리 해안을 떠올리게도 한다.
상족암 내의 동굴에 들어가 보는 것을 끝으로 오늘의 메인 탐방지인 연화산으로 향한다.
당항포 쪽빛 바다가 거기 있다
경상남도 고성군에 소재한 연화산蓮花山은 태백산맥의 최남단 여맥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을 중심으로 크게 동서 방향의 능선과 남북방향의 능선이 교차하는데, 주변에 고찰과 문화재가 산재하여 1983년에 경상남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관광지와 국도를 벗어나 옥천사 주차장으로 와서 배낭을 짊어 멘다. 등산 안내도를 살피고 예정했던 대로 연화 1봉을 가는 길로 잡는다. 주차장 들머리에서 2.26km라고 적혀있다.
등산로 입구 협곡으로도 움푹 들어간 공룡 발자국이 있다. 역시 명실상부한 공룡의 도시임을 부각한다. 고성 하이면 덕명리의 고생물 화석 산출지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 발자국 산지로는 다양성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며 중생대 새 발자국 화석지로도 세계 최대라고 한다.
“여기가 바로 쥐라기 공원이군.”
약 2억 년 전, 트라이아스기와 쥐라기 사이의 약 1만 년에 걸쳐 대멸종이 일어났는데 이때 수많은 해양생물이 거의 완전히 사라졌고 조룡, 피토 사우루스, 아예토사 우루스, 라우이수키아를 비롯한 공룡 등 일부 파충류까지도 완전히 멸종했다고 한다.
소행성의 충돌로 인해 이토록 많은 생물이 멸종했다는 주장이 대세이긴 하지만 충돌 당시 생긴 것으로 보이는 큰 분화구가 사실은 그보다 천만년이나 더 오래된 것으로 밝혀져 생물의 멸종 원인에 대한 열띤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혹여 부화하지 못한 공룡 알이 있지는 않을까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데크를 지나 잡목이 우거진 숲길과 지능선을 지나서 널찍한 바위가 있는 암벽 쉼터에 닿을 때까지도 공룡 알이나 새끼는 발견하지 못했다. 내처 완만한 등산로로 올랐다가 또 가파른 오르막을 치고 올라 돌무더기와 나무벤치가 설치된 연화 1봉(해발 489m)에 도착하였다.
연화 2봉은 눈길만 던지고 느재고개 방향으로 내려선다. 연화 2봉은 연화산과 동떨어져 가고자 하는 방향을 많이 벗어났기 때문이다.
차량 도로가 지나는 느재고개에서 돌아보니 연화 1봉에서 꽤 가파르게 내려왔다는 걸 알게 된다. 아직 1km가 남았다. 연화산으로 걸음을 내디디면 바로 측백나무 울창한 수림으로 파고들게 된다. 그리고 숲을 빠져나와 바람난 여인을 자세히 관찰하려 몸을 낮춘다. 얼레지 군락에서 꽃잎을 뒤로 말아 감는 보라색 꽃잎을 접사 하기 위함이다. 백합과에 속하는 얼레지는 아침에 꽃봉오리가 닫혔다가 햇볕을 받아 벌어진다. 그리고 다시 오후가 가까워지면 꽃잎이 뒤로 말리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봄산에서
얼레지꽃을 만나면
잠시 걷던 발길 멈추시고
‘바람난 여인’이란
얼레지꽃의 꽃말이 궁금하시면
가만히 지켜보실 일입니다
밤새
꽁꽁 닫아걸었던 꽃봉오리
아침햇살 닿으면
제 안의 뜨거움 어쩌지 못해
활짝 가슴을 풀어헤치는 얼레지꽃의
황홀한 반란
나도 그대에게
한 송이 얼레지꽃이고 싶습니다.
- 얼레지꽃 / 백승훈 -
몸을 일으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고도를 높여 싸리재라고도 하는 월곡재에 닿는다. 월곡재에서 연화산 반대쪽 아래 250m 지점에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을 뒤로하고 연화산으로 오르며 시원하게 트인 조망터에서 연화 1봉과 그 뒤로 연화 2봉을 나란히 바라본다. 옥천사 계곡도 내려다보고 1분 정도 더 올라 연화산 정상(해발 528m)에 이른다. 키 큰 나무들로 인해 조망은 없고 대신 돌무더기 위에 장승이 서 있다.
산정을 중심으로 사방이 비교적 수수하게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는 연화산이다. 조금 비켜서서 공간을 확보하면 남쪽으로 당항포의 쪽빛 바다가 보인다.
고성 당항포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과 1594년 두 차례에 걸쳐 이순신 장군이 왜선 57척을 전멸시킨 당항포해전이 있던 곳이다. 이충무공의 멸사봉공 혼이 깃든 당항포대첩을 기리고자 1981년 군민들이 성금으로 대첩지를 조성하고 1984년 관광지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연봉 속에 파묻힌 옥천사의 전경도 눈에 담고 행보를 이어간다. 꽤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운암고개에 이르렀다가 여기서 220m를 올라 역시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남산 정상(해발 427m)에 올라선다.
여기서 내려서면 갓바위와 용바위가 있다. 너럭바위라고도 부르는 갓바위는 연화산 정상을 바라보고 있다. 갓바위 안내판에는 갈마음 수형이니 비룡상천형이니 하는 난해한 용어가 적혀있는데 한마디로 기도를 하면 복 받을 수 있는 명당자리임을 나타낸 내용이다. 갓바위를 거쳐 시루떡 모양의 바위를 보고 다시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형상의 용바위를 보게 된다.
그리고 옥천사 쪽으로 하산로를 잡아 황새고개에 이르게 되고 예정에 없던 신유봉, 옥녀봉, 장군봉으로 향하는 길을 버리면서 청련암으로 내려선다. 연蓮과의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여기도 연꽃 연 자를 쓴 청련암靑蓮庵이니 말이다. 고성에 와서, 연화산에 와서 성숙 청정을 몸소 느꼈으면 이곳을 떠나서도 연꽃 닮은 사람으로 존재해야 할 것이거늘.
“역시 쉬운 일은 아니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돌계단을 내려서서 측백나무 숲을 지나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옥천사 경내를 차분히 둘러본다. 대웅전 뒤의 옥천 샘은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수량과 수온이 늘 일정하며 위장병,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한 바가지를 단숨에 마신다. 샘 위에 옥천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복두꺼비 바위를 슬쩍 쓰다듬고 경내를 빠져나와 도로를 따라 일주문을 지나면 길 오른편으로 짙푸른 옥천 늪지대가 물결을 일렁인다.
때 / 봄
곳 / 옥천사 주차장 - 암벽 쉼터 - 연화 1봉 - 느재고개 - 월곡재 - 연화산 - 남산 - 황새고개 - 청련암 - 옥천사 - 원점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