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산 24
암반지대와 거친 너덜 오르막, 밧줄이 설치된
암릉 구간을 올라 능선에 이르면 익산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시선 닿는 곳마다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처럼 봄기운 물씬하다
백제 무왕이 거대 사찰인 미륵사와 제석사를 창건하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쌓은 이후부터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지역인 금마 지방은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6·25 한국전쟁 후 전후 복구사업과 함께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그 면모를 일신한 익산시는 영농의 기계화와 과학화를 추진해 주변의 김제시, 군산시와 함께 호남평야의 농산물 집산지이다. 오늘날의 익산시는 육상교통의 중심지로서 전주시, 군산시와 더불어 전라북도의 중심 공업지역이기도 하다.
전북 군산에 일이 있어 갔다가 봄이 오는 소리를 엿들으려 향한 곳이 익산이다. 익산시에 소재한 용화산, 용리산과 미륵산을 연계하여 산행하면서 봄을 맞기로 한다.
익산시 금마면과 왕궁면에 걸친 용화산龍華山은 옛날에는 미륵산까지 포함하였으나 지금은 미륵사지가 있는 북쪽은 미륵산이라 하고 나머지 산지를 용화산으로 구분하고 있다. 미륵이나 용화는 모두 미륵신앙과 관련한 명칭이다.
소나무 숲길 따라 아리랑고개로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및 신용리 일원에 자리 잡은 조각공원인 서동공원을 용화산의 들머리로 잡는다. 국내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 68점이 전시되어 있고, 전망대 등 수변과 휴식공간에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장소와 산책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삼한 시대의 부족 국가였던 마한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마한관 오른쪽으로 나무계단이 나 있는데 이 계단을 통해 용화산을 오르게 된다. 용화산까지 2.8km의 거리이다.
분묘 지대 사이의 황톳길을 따라 걷는데 금세라도 비가 뿌릴 것 같았던 습한 날씨가 환하게 개고 있다. 아늑한 평지의 산책로가 침엽수림 숲길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축축했던 대지에서 화사한 꽃망울이 터질 것도 같고 새 울음도 길게 메아리를 뿌릴 것만 같다. 맹위를 떨쳤던 혹한은 바야흐로 생동의 계절로 접어들었음이다.
맞은편에서 교차하는 가벼운 차림의 산책객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살짝 경사진 고개를 오르자 익산시 왕궁면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가끔 바위 지대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 편안한 오솔길이다.
헬기장에 이르면서 곧 잇게 될 미륵산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기둥에 밧줄로 연결한 오르막을 살짝 치고 올라서서 용화산 정상(해발 342m)에 다다른다. 넓은 주차장이 있어 접근성이 가장 좋은 서동공원에서 올라왔지만, 용화산은 둘레길로 연결되어 있어 피톤치드 뿜어내는 두 동 편백 숲과 시조 작가이자 국문학자였던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에서도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
이병기 선생이 담배를 끊게 된 일화는 유명하여 그를 아는 이들은 자주 회자한다고 한다.
“얘야! 담뱃불 좀 붙여오너라.”
방 밖으로 담뱃대를 내밀며 가람이 말하자 조금 후 불을 붙인 담뱃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담뱃대를 받아 든 가람이 밖을 내다보니 아버지가 불을 붙여 넣어준 것이었다. 그 직후 바로 담배를 끊은 가람은 담배를 물지 않고도 시조 ‘별’을 짓는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가람의 별을 헤어 보다가 용리산으로 가는 갈림길인 아리랑고개로 향한다. 호젓한 산길이다. 날씨까지 좋아 봄기운이 에너지로 승화되는 기분이다. 바위 지대를 지나 사격장 출입금지 철조망이 나타난다. 수북하게 깔린 낙엽을 밟으며 전망이 트인 공터에 이르러 건너편으로 봉긋 솟은 미륵산을 마주하게 된다. 왼쪽 아래에는 서동공원에 인접한 금마저수지가 주변 언덕을 물에 담그고 있다.
전망 지대를 뒤로하고 나지막한 봉우리를 지나면 철조망을 우회하여 돌탑이 쌓여있다. 돌탑 오른쪽의 리본이 달린 길을 지나 왼쪽으로 아리랑고개와 미륵산, 오른쪽 용리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용화산 정상에서 1km를 내려온 지점이다.
인적이 끊겨 더욱 고요한 숲길에 다양한 형태의 소나무들이 차분하게 반겨준다.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해서 이어가다가 삼각점이 박혀있는 봉우리에 닿았다. 용리산 정상(해발 306.8m)이다.
정상 남쪽으로 몇 기의 봉분이 있고 수목이 우거져 시야는 가려졌다. 익산시 여산면 제남리를 소재지로 한 용리산과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소나무 숲길을 따라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아리랑고개로 향한다.
도랑처럼 움푹 팬 길을 지나고 꾸불꾸불한 잡목 숲길을 지나서 미륵산이 더욱 가깝게 다가선 너럭바위 지대에 이른다. 나무들이 쓰러져 널브러진 숲길을 지나고 완만한 경사 구간을 내려서면 차량 도로인 아리랑고개가 나온다. 3.7km 떨어진 심곡사와 익산시 남산면으로 이어지는 아리랑로이다.
아리랑로를 가로질러 미륵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오르막이 제법 가파르게 시작된다. 정정렬 명창길이라고 명명한 둘레길에 이르러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1876년 익산에서 태어난 명창 정정렬은 신서편제의 개척자이면서 근대 판소리 5대 명창 중 한 사람이다. 판소리 창극을 정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여 현대 창극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
문화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여기서 500m를 오르자 높고 견고하게 축성된 미륵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옛 마한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이 지역에 둘레 1822m의 성곽으로 축성된 미륵산성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12호로 미륵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며 성문에는 옹성을 설치하였다.
등산로는 산성을 따라 이어진다. 산성을 걸으며 지나온 용리산과 용화산 능선을 보게 된다. 미륵산성을 지나면서 크고 작은 바위가 널려 있는 너덜 길이 이어지는데 아마도 성을 축조하고 버려진 남은 돌들이 아닐까 싶다.
암반지대와 거친 너덜 오르막, 밧줄이 설치된 암릉 구간을 올라 능선에 이르면 익산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시선 닿는 곳마다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처럼 봄기운이 물씬하다. 다시 돌담 쌓은 능선을 지나고 기암 바위들이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서 통신탑 쪽으로 향하다 보면 태극기가 있는 돌탑이 보이는데 여기가 미륵산彌勒山 정상(해발 430.2m)이다.
익산시 금마면, 삼기면과 낭산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옛 이름은 용화산이었으나 미륵사가 지어진 후부터 미륵산이라고 부른다. 또한, 봉우리가 사자의 형상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자봉이라고도 한다. 미륵산만의 산행코스로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발하여 약수터를 지나 정상에 이르는 길과 구룡마을에서 시작하는 길이 있다. 정상에서 미륵사지가 있는 연수원 주차장까지 1.94km이다. 잠시 머물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미륵사지 쪽으로 내려간다.
미륵산성 터이면서 문화재 조사구역을 지나 삼거리에 이르러 내리막 걸음을 빨리한다. 계단을 내려서고 사자암 삼거리에서 사자암을 다녀오기로 한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104호인 사자암은 백제 시대의 사찰로 금산사에 딸린 작은 말사이다. 절벽 사면에 터를 다듬어 세운 사자암에는 몇 그루의 우람한 느티나무가 솟아있고 앞뜰에는 탑과 석등에 세워져 있다. 여기서도 익산 시내가 한눈에 잡힌다.
기름 한 말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큰 홈이 팬 등잔암 외에 4m 높이에 구멍이 나 있는 투구바위, 안질에 좋다는 약수터, 사자암, 심곡사, 왕궁탑 등 명소와 볼거리가 다양하다. 주변에는 익산 미륵사지 외에도 익산쌍릉,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보물 제45호),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보물 제44호), 가람 이병기 생가 등 중요한 문화유적이 많고, 금마면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유명한 왕궁온천이 있다.
사자암을 뒤로하고 다시 사자암 삼거리로 돌아와 계단을 내려선다. 나뭇가지를 잘라 등산로로 만든 길이 이색적이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고 임도를 걸어 세계유산 백제 역사지구 미륵사지에 내려선다.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는 백제 30대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는 백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의 사찰 터인데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국보 제11호로 동양 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이곳에 있다.
당간은 절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로 주로 사찰 입구에 세워둔다.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으로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하였다. 지금은 약 90m의 간격을 두고 지주만 남아있다. 당간지주 뒤로 보이는 우람한 동원 9층 석탑을 보는 것으로 익산에서의 세 곳 산행을 마무리한다.
때 / 초봄
곳 / 금마면 서동공원 - 헬기장 - 용화산 - 아리랑고개 삼거리 - 용리산 – 아리랑고개 삼거리 - 아리랑고개 – 정정렬 명창길 - 미륵산성 - 미륵산 – 사자암 삼거리 - 사자암 – 사자암 삼거리 - 미륵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