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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산중 종갓집,
수도권 중심의 허파 도봉산

경기도의 산 5

by 장순영

Y 계곡의 오르막 정상에서 건너편 내리막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건너가서 뒤이어 건너오는 이들을 보면

그 아찔함에 먼저 죗값을 치른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북한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도봉산은 우이령을 경계로 그 북동쪽에 자리하여 북한산과 구분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시와 접하고 있다.

주말과 휴일이면 수도권 전철 1호선과 7호선은 산행 열차처럼 온통 등산객들로 붐빈다. 그 구간 선상의 도봉산역으로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일 산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등산객이 탐방하는 명산이다.

신년 첫날,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엔 눈이 얼어 빙판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도봉산에서도 꽤나 가파른 바윗길을 고른다. 도봉산의 많은 길 중에서도 망월사역 엄홍길 전시관부터 심원사를 지나는 다락능선과 Y 계곡이 신변 벽두부터 자석처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세 살 때부터 도봉산에서 살았어요. 내게는 어머니와 같은 산이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도봉산을 누볐죠.”


엄홍길, 히말라야 8000m급 고산, 에베레스트, K2, 칸첸중가, 로체, 얄룽캉, 마칼루, 로체샬, 초오유,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낭가파르밧, 안나푸르나, 가셔브롬 1, 브로드피크, 가셔브롬 2, 시샤팡마의 16좌를 오른 세계 최초의 인물이다.

극한 상황에서 생사를 던진 도전과 모험정신의 상징인 엄홍길의 자취를 볼 수 있는 엄홍길 전시관이 도봉산 원도봉 진입로에 있다.



산은 비록 혼자 오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원도봉 탐방센터를 지나 도로를 따라 심원사 앞까지 올라간다. 갈림길에서 포대능선이 아닌 자운봉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뚝 떨어진 영하의 날씨, 그런데도 난간 쇠줄이 차갑지만은 않다. 앞서 오르는 이들의 온기가 손에 전해져서일까. 다리뿐 아니라 온 근육에 힘 들어갈 고행을 사서 하는 그들 뒷길에서 무한한 동지애를 느낀다.

그래서 산은 비록 혼자 오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산은 늘 가정에 비유되곤 한다. 지친 퇴근길 어깨 처져 들어오지만, 가족이 있는 곳. 들어오면 어머니 품처럼, 따뜻한 온돌처럼 한겨울에도 온기 가득한 곳이 산이다.

지천명 훌쩍 지나 나이 한 살 더 먹는 건 아무런 감각이 없다. 새해 첫날, 도봉산 험로를 골라 걸으며 나이 차는데 무뎌지는 대신 힘에 부치는 물리적 상황에도 마저 무뎌지고자 한다. 나이 헤아려가며 세속의 벅찬 삶 헤칠 틈 있던가. 나이 맞춰가며 해나갈 일 무어 있을 텐가.

전면에 마주 보이는 수락산은 엊그제 내린 눈으로 도정봉부터 주봉까지 하얗게 포장되었다. 심원사에서 오르는 능선은 탁 트인 조망처가 특히 많아 바윗길이 다소 거칠기는 해도 그다지 힘이 들지 않는다.

금붕어바위와 두꺼비바위 등 눈길을 잡아끄는 바위가 많고 숨 고르면서 바라볼 봉우리들이 줄줄이 늘어섰기 때문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절리節理와 풍화작용으로 벗겨진 봉우리들이 연이어 기암절벽을 이루며 솟아 있다.

다락능선의 바위 구간을 오르면서는 추위마저 잊게 된다. 전망 바위 언저리에서 눈 덮인 망월사를 바라보노라면 언제나처럼 푸근하다. 볼 때마다 망월사는 포대능선 아래 천혜의 절터라는 생각이다.


새해 첫 설산은 한 폭 수묵화

점점이 먹이 도드라지는 건 면면 흰색이 바탕이라서

밤하늘 몇 점 별빛 반짝이는 게

어둠 겸허히 가라앉은 것처럼

손에 때 묻히어 세상 빛이 날 수 있다면

내 손,

허접 데기 걸레인들 어떠리


한겨울에도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과 신선대가 의연하다


한 폭 겨울 산수화를 감상하고 또 도봉산 정상부를 가장 멋지게 바라볼 수 있는 전망 바위에 이른다. 많은 등산객의 쉼터이자 포토존이다.

정초에 반가운 이를 만나는 건 흐뭇하고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로부터 우리네 전통은 신년 초 가까운 이, 고마운 이, 존경하는 이들을 찾아 부둥켜안고, 악수하며 그 마음을 표현해왔다.

산꼭대기 종갓집 찾아 인사드리듯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과 신선대까지 도봉산 사령부와 눈 맞춤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즐거운 일이다.

눈까지 얼어붙어 다가서면 무심히 외면할 듯 주름 암팡진 도봉 4봉이지만 보면 볼수록 그 비탈에 야박함이라곤 전혀 없이 너그러운 풍모를 지녔다.

가까이 다가서서 저들 봉우리를 마주 보노라면 미국을 빛낸 네 명의 대통령, 초대 조지 워싱턴, 3대 토머스 제퍼슨,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16대 에이브러햄 링컨의 얼굴이 나란히 조각된 러시모어Rushmore 산이 떠오른다.

흔히 우수한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비교 대상으로 주목받곤 한다. 저 봉우리들에서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모습이 유추되는가 싶더니 금세 입맛이 씁쓸해지고 만다. 수십 년이 더 흘러서라도 우리 자손들이 은퇴한 대통령들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소망을 넘어선 턱없는 욕심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한 사람을 모델 삼아 예수와 유다, 두 인물을 그렸다고 한다. 온화한 모델의 모습에서 예수를 그렸고, 그의 화난 모습에서 사악한 유다를 또 그려냈다고 했던 것 같다.

독재, 친인척 비리, 부정축재……, 아직 임기가 남은 대통령에게서 제 손으로 뽑은 걸 후회하는 현실……. 유다에게서 미리 유다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남는 건 자책과 후회뿐이다.

그늘진 면면들만 각인시키는 통치자들이 줄줄 뇌리를 스쳐 세차게 고개 흔든다. 그렇게 과욕이나 다름없는 사치스러운 생각일랑 접어버린다.

그들로부터 산으로 넘어가는 상념의 이동은 역전 버저비터처럼 호쾌한 반전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쉽게 선인봉, 만장봉 그리고 최고봉인 자운봉을 접할 수 있다는 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큰 행복이다. 그래서 도봉산은 대가족이 모여 사는 가정처럼 다복하다.

접사接瀉, 오밀조밀한 꽃잎이나 곤충들의 생태에 근접해서 찍는 촬영을 표현하는 말이다. 정상부에 가까이 다가서면 오래 묵어서 퀴퀴하긴 하지만 코를 뗄 수 없을 정도로 정겨운 외할머니의 품이 느껴진다.

비릿한 젖내 풍기지만 모성의 진한 향수 때문에 그리워 콧등 시큰해지는 어머니의 가슴이 떠오른다. 아랫목 깊숙이 메주를 묻어놓고 두 분 모녀가 마주 앉아 실타래를 풀고 또 감노라면 우리 형제는 다락방에 올라 바람 휑한 구석에서도 희희낙락 밤늦도록 나뒹군다. 신선대, 저기 자운봉에서 살짝 비켜선 신선대가 바로 그 다락방이다.



Y 계곡 건너면 그 아찔함에 먼저 죗값 치른 기분이 들어


포대능선과 합류하여 Y 계곡으로 간다. 왜 저들은, 또 나는 안전한 우회로를 두고 이 길로 들어서는 걸까. 산에서의 사고는 본인의 실수나 부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산이 사람을 어둠이나 벼랑으로 밀어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여기 오면 근거 희박한 그 말이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인지 Y 계곡의 오르막 정상에서 건너편 내리막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건너가서 뒤이어 건너오는 이들을 보면 그 아찔함에 먼저 죗값을 치른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뒤따라 아슬아슬하게 건너오는 여성들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산을 오르다 보면 종종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할 수 있는데 그러한 느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여기 Y 계곡이다. Y 계곡에서 아줌마 부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라는 걸 실감하고 또 공감하는 것이다.

역시 산은 누구에게나 가장 공평한 곳이라는 진리를 되새기기도 한다. 산 좋아 산 찾는 이들, 그네들 스스로 어디 남녀노소 따져가며 길 택하던가. 다소 가파른 오르막이면 쇠줄 꼭 잡아 몸 의지하고, 내리막 무너미고개 미끄러우면 보폭 줄여 발 내디디면 되지. 산만큼 차별 없는 곳이 세상천지 어디 또 있던가.

Y 계곡을 건너 신선대에도 많은 이들이 올라있다. 첩첩 주름 깊어 볕 들다 만 바위 봉우리의 어깻죽지는 채 녹지 않은 눈으로 인해 올리브유를 잔뜩 바른 보디빌더처럼 더욱 우람한 근육을 자랑한다.

초록에 지치고 붉음에 겨워 훌훌 털어버린 나목들은 흰 눈으로 다시 채워진 모습이고, 어느 시인의 말처럼 소나무는 한겨울에 그 푸름을 더하고 있다.

도봉 3봉이라 일컫는 자운봉(해발 739.5m), 만장봉(해발 718m), 선인봉(해발 708m)은 정상 등정을 제한한다. 일반 등산객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인 신선대(해발 725m)에 오르니 멀리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과 아득히 문수봉, 비봉 등 북한산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아득한 것처럼 원근감이 뚜렷한 북한산의 숱한 봉우리들이 서로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손이 젖어 악수하기가 꺼림칙하네요. 곧 들를 테니 그때 인사들 나눕시다.”

“그만치 떨어져서 보니까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좋구먼.”


문수봉이 새해 인사치고는 씁쓰레한 말투로 질투심을 나타낸다. 북한산에도 봉우리마다 많은 등산객이 넘쳐날 것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은 거리 차에 무관하게 거기가 여기고, 여기가 거기다. 번갈아 숱하게 다니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든다.

능선이 바뀌고 봉우리 하나 다시 넘어도 도봉산은 거침없이 이 계절의 매력을 발산 중이다. 포대능선에서 도봉 3봉을 지날 때도 그 빼어난 풍모에 수차례 걸음을 멈춰 섰겠지만, 능선 서쪽으로 들어서 주봉과 칼바위를 지나노라면 의연하고도 견고한 산세와 변화무쌍한 조망에 걸음을 재촉할 수가 없다. 사방 원근 두루 시선을 박아야 하기 때문이다.

도봉산 우이암.jpg 우이암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잠시 멈췄다


도봉 주능선을 지나면서 소귀 빼닮은 우이암을 점차 가까이하다가 오봉능선으로 돌면 또 다른 질감, 또 달라진 분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다섯 중 네 개의 봉우리가 머리 위에 상투를 튼 것처럼 바위 하나씩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다섯 총각이 사는 고을의 원님에게 아주 어여쁜 외동딸이 있었는데 총각들 모두 원님의 딸을 사모했다. 누구를 사위로 삼을지 고민에 빠진 원님은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냈다.


“이곳 우이령에서 저 산을 향해 바위를 던져 제일 높이 던진 사람에게 내 딸을 주마.”


그렇게 해서 총각들이 던진 다섯 개의 봉우리가 이곳에 떨어져 나란히 세워졌다고 한다.


“올해엔 더더욱 우의 있게 지내세요.”

“올해는 우리 막내 장가를 보내야 할 텐데 중매 좀 서게.”


초롱초롱한 매무새의 다섯 형제, 오봉(해발 660m) 중 장형은 새해 인사도 건너뛴 채 어려운 부탁을 한다.


“저 뒤에 어여쁜 여인네들이 오고 있으니 돌을 멀리 던진 여인을 고르시는 게 어떨까요.”


오봉 중 상투가 없는 봉우리를 흘깃 보며 건성으로 내뱉고 등을 돌렸는데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올 때마다 자태를 달리하고 그 달라짐이 새로운 조화의 모습임을 깨닫게 하는 곳이 도봉산이다.

특히 오봉은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어떤 틀에 의해 정연하게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카오스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다섯 형제의 규칙 감과 거기 짙게 밴 형제애를 느끼게 한다.

오봉은 나름의 정연한 질서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오봉 남벽은 위압적이다


사계절 다르지 않게 도봉산은 가슴 한복판을 톡 쏘아 속을 산뜻하게 해 준다. 맑고도 신선한 특유의 정기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시로 정지되곤 하는 현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철저히 깨부수는 곳, 편협한 시각을 새로이 자각시키는 곳. 거기가 바로 도봉산이다.

그러하기에 수시로 찾아 탐심이라 할 만한 것들을 내던지고 정작 필요한 그 무엇으로 버린 자리를 채우게끔 한다.


“올핸 시집가셔야죠.”


여성봉(해발 504m)으로 건너뛰니 혹한에도 여전히 부끄러움 없이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결혼을?”

“저기…… 오봉 형제 중 하나가 아직 총각인데……”

“난 독신주의자야.”


화강암인 봉우리 꼭대기의 타원형 구멍은 물리적, 화학적 풍화작용으로 생긴 풍화혈이라는 것인데 여성의 신체와 닮아 여성봉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여느 산의 비슷한 바위들이 대개 음지에 숨어있는 데 반해 도봉산 여성봉은 양지바른 산정에 떳떳하고도 과감하게 스스로를 개방하고 있다.

여성봉에서 바라보는 오봉은 바로 앞에서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형상으로 늘어서 있다.


“올해도 막내 장가보내기가 쉽지 않겠네요. 혼자 사는 것도 결코 나쁘지는……”


그들 형제에게 독신을 합리화시킬 수 없어 말미를 얼버무리고 만다. 북한산 상장능선과 더 뒤로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의 북한산 정상부를 바라보고, 사패산과도 인사를 나눈 후 송추 오봉 탐방센터로 내려선다.

새해 첫날 산행을 하고 내려가는 이들의 표정이 너나 할 것 없이 밝다. 지금 그들의 표정처럼 올 한 해만큼은 누구에게나 시름이 덜어졌으면 좋겠다.



때 / 겨울

곳 / 망월사역 – 원도봉 탐방센터 - 심원사 - 다락능선 - 포대능선 - Y계곡 - 신선대 - 도봉 주능선 - 주봉 - 오봉능선 - 여성봉 – 오봉 탐방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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