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산 6
김일성의 32대 조상인 김태서 묏자리
땅기운이 발복 하여 49년간
그의 32대손이 집권하고 그 후로도
내리 세습할 수 있었다는 설이 나돈다.
모악산 관광단지에 들어서서 올려다본 모악산 정상부는 마치 관악산을 보는 듯하다. 세워진 송신탑의 모양새도 그렇거니와 그 주체도 방송 송출을 위한 한국방송공사 KBS라는 게 같다. 일설에는 꼭대기에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형상의 큰 바위가 있어 모악산이라고 불린다는데 그건 올라가서 확인해볼 일이다.
완주, 전주, 김제에 걸친 모악산은 빼어난 경관과 국보급 문화재가 많아 호남 4경에 속하며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어머니의 산이라는 엄뫼로 칭하다가 한자 의역하여 모악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데 고은 시인의 큼지막한 모악산 시석에서 모악산이 어머니임을 확인한다.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 외다
저 혼자 떨쳐 높지 않고
험하지 않고
먼데 사람들마저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내 자식으로 품에 안은 어머니 외다
여기 고스락 정상에 올라
거룩한 숨 내쉬며
저 아래 바람진 골마다
온갖 풀과 나무 어진 진승들 한 핏줄 이외다
이다지도 이다지도
내 고장 모악산은 천년의 사랑이외다.
오 내 마음 여기 두어
민중 신앙의 성지, 모악산
모악산 표지석을 거쳐 짧은 나무 현수교를 건너 대원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며칠 전에 큰비가 내려서인지 다리 아래 계곡의 수량이 제법 불었다. 나뭇잎들도 건강하고 싱그럽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폭포와 윗부분이 들러붙은 듯한 바위를 보게 된다. 보름달이 뜨면 백자골 숲으로 내려오는 선녀 중 하나와 눈이 맞은 나무꾼이 사랑을 속삭이며 입을 맞추는 순간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뇌성벽력이 울리면서 그 둘은 돌로 굳어졌다는데 팻말에 적힌 선녀폭포와 사랑 바위의 유래를 해피엔딩으로 각색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입 좀 맞추었기로서니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리다니. 그것도 어여쁜 선녀까지.”
둘이 마을 아래 아담한 초가를 짓고 아들딸 열 명쯤 낳아 살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질투심 많은 산신령 같으니.”
다시 여러 개의 목교를 지나면 전주 김 씨 시조 묘 갈림길이 나온다. 김일성의 32대 조상인 김태서 묏자리 땅기운이 발복 하여 49년간 그의 32대손이 집권하고 그 후로도 내리 세습할 수 있었다는 설이 나돈다.
또 재미있는 설은 이 근처에서 북한 간첩들이 가장 많이 잡힌다는 것이다. 간첩이 김태서의 묘에 잠입하여 새벽에 벌초하는데 그때 국정원 요원들이 잡아들인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이북 주민 중 전주 김 씨들은 한동안 그들의 본관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과 같은 본관이라 빨갱이로 몰릴 것을 두려워해서다.
서글픈 역사의 굴레를 곱씹으며 걷다 보니 대원사 갈림길이 나온다. 계속 대원사 방향이다. 어머니 품 같은 최상의 길지에 자리 잡았다는 대원사는 효孝의 발원을 이루는 사찰이라 하여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예를 갖춰 기도하는 이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대원사에서 나와 조금 더 오르면 수왕사가 나오는데 이 절도 아래 대원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때 빨치산 토벌 작전 때문에 소실된 걸 복원했다니 이 또한 김태서의 묏자리 기운이 너무 드세 종교까지 눌렀던 건 아닐까 싶어 진다. 수왕사 약수를 물통에 채우고 중인리 갈림길 그리고 헬기장을 거쳐 무제봉까지 간다.
무제봉과 장군봉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웃음을 자아낸다. 가뭄이 들면 전라감사와 지역주민들이 돼지를 잡아 무제봉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그 남쪽의 장군봉 인근에 묘를 쓰면 천하명당의 기운을 상실하여 가뭄이 들기 때문에 그곳에 암매장하는 걸 감시했다고 한다. 신흥종교를 배출한 민중 신앙의 성지라는 모악산의 설화답다.
전망대에서 구이저수지와 그 뒤로 경각산을 내려다본다. 김제평야와 만경평야 등 연녹색 드넓은 호남평야의 농지를 빼고는 온통 진초록 바탕이다. 한여름 오후는 피부를 따갑게 하는 강렬한 햇살뿐 아니라 눈에 차는 것만으로도 그 접촉이 강하고 진하다.
전주 시내의 아파트 단지들도 나른하게 보인다. 강원도나 경상도 산에서의 조망처럼 산들이 높거나 깊거나 혹은 너르지 않아 고도를 높일수록 신분이나 계급이 스스로 높아지는 착각이 들곤 한다. 눈에 보이는 1차원적인 형상에서 상대를 평가하려는 원초의 본능 탓일 게다.
콘크리트 벽에 철조망까지 둘러친 구축물을 돌아 계단에 올라서자 모악산 정상(해발 793.5m)이라는 나무 팻말이 낮게 박혀있다. 정상석도 없이 정상을 차지한 송신소 내부에 자그마한 나무표지판을 박아놓았으니 결국 모악산 정상은 송신소 옥상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사통팔달 호남을 둘러본다.
1995년 시행된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농촌 지역이던 김제군과 도시기능을 담당했던 김제시가 통합되어 도농통합형태의 김제시를 이루었는데 북봉 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김제평야가 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롭다,
무성한 수림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금평저수지의 물도 곧 고갈될 듯하다. 화사한 봄꽃은 피었다 싶으면 지고 오색단풍은 물들다 바로 떨어지고 말아 점점 봄이나 가을의 틈바구니는 좁아지기만 한다. 올여름도 장기 집권할 것처럼 느껴진다.
“폭염이 기승을 부려도 미세먼지랑 황사만큼은 줄었으면 좋으련만.”
저 밑에서 이 산의 정상을 올려보거나 여기서 전망을 즐기려면 미세먼지뿐 아니라 뾰족하게 높이 솟은 송신탑들을 시야에서 배제해야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든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여러 곳에 박혔던 철주 제거작업이 1980년대 말 KBS에 의해 벌어졌다고 들은 바 있다. 그런데 호남의 영산이라는 이곳에 전주 KBS에서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송신탑과 각종 시설물을 세움으로써 찾는 이들의 상을 찌푸리게 한다.
“김제 시민들은 산에 가는 것보다 TV 드라마 보는 걸 훨씬 좋아하는 걸까.”
사견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유로 합리화시키더라도 긍정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다.
“낡은 케이블카로 물품을 실어 나르는 것도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야.”
내 고장 모악산은 어머니외다. 옥상을 내려와 장근재 쪽으로 향하며 고은 시인의 시구를 다시 떠올리는 건 어머니 머리에 비녀 대신 꽂힌 송신탑이 자꾸 거슬려서일 게다.
헬기장을 지나 쉰길바위에 이른다. 아기 안은 어머니의 모습이라는 쉰길바위를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그 형상을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 쉰길바위에서 되돌아본 정상의 송신탑들이 무더위에 금세라도 휘어질 것처럼 보이는데 역시 서울의 관악산과 닮은 모습이다.
“기상대만 하나 더 세웠다면 여기가 거긴데.”
그러나 우거진 그늘숲길을 걸으며 철제 시설물에 대한 고정관념은 잊어버리고 만다. 산죽 오솔길에서 모악산의 좋은 인상만 뇌리에 담기로 한다. 장근재에서 계곡물소리 들으며 걷노라니 호남의 풍성한 모습들이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준다. 여기 모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만경강과 동진강으로 흘러들면서 호남평야의 풍요한 농작물 생산에 이바지한다고 한다.
내리막길을 걸어 케이블카 탑승 건물을 지나고 다시 모악정을 지나 금산사에 이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인 금산사에는 신라 때부터 미륵 본존을 봉안했다는 국보 제62호인 3층 규모의 미륵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25호인 5층 석탑, 보물 제26호 석종 외에도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부지기수 보유하고 있다. 넓은 경내에는 이러한 문화재뿐 아니라 보리수, 벽오동, 배롱나무 등 귀한 나무들이 보기 좋게 심겨 있다.
“어서 오라 내 자식으로 품에 안은 어머니외다.”
금산사에서 나와 금평저수지를 들러 깊고 푸른 물길 위 데크를 걸으면서도 모악산을 읊조리게 된다.
“내 고장 모악산은 천년의 사랑이외다.”
내 마음 여기 두고 김제에서의 여행, 뜨거운 여름날의 모악산을 등 뒤로 한다.
때 / 여름
곳 / 모악산 관광단지 - 선녀폭포 - 대원사 - 무제봉 - 전망대 - 송신소 - 남봉 – 쉰길바위 전망대 - 장근재 - 모악정 - 금산사 - 금평저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