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과 신도비,
그리고 수양대군과 한확

에세이 - 그곳에 서니 그들의 영혼이 2

by 장순영

조선왕조 500여 년의 역사를 되짚어보노라면 비통하고 불운한 시절이 많다. 특히 왕실 혹은 왕조에서 그런 일들이 많았는데 수양대군과 조카인 6대 단종의 애증愛憎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남양주시는 그 일대가 옥수玉水와 수목이 무성한 유원지이자 곳곳이 유적지이며 또한 왕릉이 많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성싶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뤄 한 여름 무더위마저도 말끔히 씻어주는 곳. 그래서 삼림욕을 겸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광릉수목원이다. 그곳 숲길의 청신한 기운이 늘 푸름의 산소를 뿜어내기 때문이리라.

광릉에 들어서서 홍살문을 지나가게 된다. 거길 지나치면서 세조의 어린 조카 단종의 애통한 슬픔이 먼저 떠오르는 건 비단 필자만의 사고는 아닐 것이다.

정자각丁字閣을 바라보고 왼쪽이 조선 7대 왕, 세조의 능이며 그 오른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자연 지세를 거르지 않고 간소하게 조영하였다고 한다.

거기서도 믿고 또 믿었던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애사에 숙연해지는 건 결과의 당위성은 원인의 정의로움에 기인해야 하기 때문이란 보수적 개념 탓일까.

널찍이 공간을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왕과 왕비의 능에서 그들 부부에 대한 후세의 평가 역시 극명하게 대비됨을 의식하게 된다.

한쪽은 범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통치력을 위해 소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운명론적 정치관일 것이며, 또 다른 측면은 당시의 정황을 억지 합리화시켜가며 나이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밀어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비정의 작은아버지란 게 그것일 것이다.

비록 세조가 즉위함으로써 탁월한 정치를 펼쳤고 보다 나은 행정력을 발휘했다 하더라도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에 그치지 않고 단종과 사육신까지 죽인 일마저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합리적이라 해서 옳은 일일 수는 없음이다.

후세의 한 사람으로서 이성적인 잣대로 세조의 과오를 헤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자꾸 드는 건 단지 선한 약자의 불행이 안타깝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사찰, 봉선사奉先寺를 지은 정희왕후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등 전란이 있을 때마다 화를 입은 절, 봉선사. 지금은 절이 창건될 때 주성鑄成된 대종大鐘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1469년, 세조가 서거한 이듬해에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에 의해 지어진 사찰로 광릉에 덧붙은 건축물이라 할 수 있겠다. 왕실의 원찰 중에서도 으뜸으로 대접받았다고 하니 세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노력이 세조 사후로도 얼마나 드셌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정희왕후가 막강한 파워로 남편의 사후를 철저히 관리한 이유가 한몫을 한다.

정희왕후, 막상 거사일이 되자 불안스러워하는 수양대군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주고 독려하며 용기를 심어주었던 여인, 그는 아마도 조선 왕조 최고의 여걸이란 평가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사후死後까지 돈독하게 이어지는 그들의 인연


다시 남양주의 한 곳,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조안면 능내리 길목 부근에 한확韓確(1403~1456)의 묘와 신도비가 위치해 있다.

한확의 본관은 청주, 자子는 자유子柔이며, 호는 간이재簡易齎,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조선 초기 문신으로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외할아버지이며 인수대비의 아버지이다.

세종이 즉위하자 명나라의 책봉 정사冊封正使가 되어 귀국하였고, 1435년에 중추원 부사가 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 되고, 1455년(세조 1)에는 좌의정에 좌익공신 1등에 오르며, 서성 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해진다.

특히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한확의 누나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비妃로 책봉되면서 한확은 명나라 황실의 벼슬, 광록 시소경光祿侍少卿을 제수받게 된다. 거기다 누이동생 또한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더더욱 외교상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의 신도비가 있는 능내리의 북쪽 인근에 수종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 절 역시 세조와의 깊은 인연으로 지어졌다고 하니 세조와 한확은 사후, 훗날에까지 남양주에서 그 연緣을 이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1등 정난공신에 오른 한확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하지 않던 명나라에 직접 들어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양위讓位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귀국하는 길에 사하포沙何浦에서 숨졌다.

세조에게 있어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신하였을 것이다. 세조 때, 한확은 객사하였음에도 권람, 한명회와 함께 공신으로 종묘에 오르는 영화를 누리게 된다.

당시 학자로서의 최고 영예는 공자와 함께 성균관에 배향되는 것이고 관료로서의 최고 영예는 주군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묘소까지 한 지역에 있게 된 것이 꼭 우연이라고만 여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다만, 후세에도 추앙을 받는 그가 명나라에서 돌아오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단종의 애통한 죽음을 과연 얼마나 슬퍼하고 용서를 빌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는 절로 고개가 저어지고 만다.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더더욱 비통해하며


광릉에서 왕숙천 옆의 소도로를 따라 12킬로쯤 지나면 퇴계원이 있고, 여기서 남양주시청 쪽으로 약 10킬로쯤 더 가면 사릉思陵에 닿는다.

살아서 같이 숨쉬기가 싫어 죽음을 앞당긴 자들과 죽어서까지 같은 하늘 밑, 지척에 있으니 이 얼마나 비통한 운명이런가. 작은아버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죽음까지 당한 단종, 그 단종의 슬픔을 가장 가까이에서 곱씹으며 82 성상을 살아온 이가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다. 밤낮없이 우는 그녀의 눈물 탓일까. 원수들과 같은 지역에 묻힌 그녀의 묘소에서 습한 물기가 젖는 듯하다.

열다섯 나이에 왕비가 되어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지만 열여덟에 신랑인 단종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정순왕후는 남편과 사별하고도 60여 년을 원수들의 부귀영화를 보며 살았으니 아아! 그 애통함을 무엇에 비기리.

사릉, 찾는 이 없이 한적해서일까. 광릉과 달리 주변은 싸늘하게 냉기가 감도는듯하고 하늘은 무겁게 갈앉은 것만 같다. 감각을 상실하지 않고 그렇게 오래 참음만으로 살 수 있을까.

모든 감각과 핏기마저 잃어 냉소조차 머금지 못하는 여인이 그런 모습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사릉 주변을 감돌고 있다면 필자의 감성이 너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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