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그곳에 서니 그들의 영혼이 7
“나라님이 귀양살이했던 곳이니까 구경 왔을 뿐이지요.”
“내 아들이 5․18 민주화운동 때 죽어서 와본 거요.”
설악산 백담사白潭寺 입구에 위치한 용대리. 평일인데도 백담사로 가려는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있다. 토산품 가게마다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그들 중 누군가가 툭 내뱉는다.
“저 가게들이 전부 전두환 때문에 먹고사는 거라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유배되기 전, 백담사라는 절을 제법 안다는 사람도 이 절이 신라 때 창건되었고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이 머물며 글을 썼었다는 정도 외에는 달리 설명할 게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백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末寺이다. 이 절의 기원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신문왕 1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했다고 한다.
그저 설악산 첩첩산중의 말단 산사에 지나지 않던 백담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대 국민 사과 성명 발표 후 이 절에 은거하면서였다. 옛날로 치면 그건 귀양살이였고 당시의 백담사는 유배지流配地였던 것이다.
그 해 겨울에도 백담사는 여지없이 하얀 눈으로 덮였다. 절의 한쪽 방에서 추위를 참으며 웅크리고 앉은 전 대통령 내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들 부부는 거기서 2년 이상을 보내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연희동 사저로 돌아간다. 아마도 세상을 사는 동안 가장 길고도 지루한 두 해였을 것이다.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다가 그 자리를 예정된 후계자에게 물려주다시피 하고 떠밀려 간 곳이 인적조차 드문 산사라니.
노태우 대통령 취임. 그 이인자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인자는 유배지로 향했다. 이를 악물었을 그 2년간의 세월에서 그의 이빨이 온전했다면 아마도 부처님의 영향을 받은 덕분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부처님 운운하며 사찰과 그를 연관시킨 건 곧 필자의 잘못된 판단이란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내 전 재산은 29만 원이요.”
그의 아들, 손자의 명의로 된 어마어마한 재산이 밝혀졌음에도 그는 전 재산을 추징, 몰수하라는 여론에 정면 반발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 전두환 때문에…”
그 지역 촌로인 듯한 사람은‘덕분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이라는 사실과 그 덕분에 장사가 잘 되어 고맙게 느낀다는 뉘앙스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내뱉음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지닌 국민감정, 그건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아직 진행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라님이 귀양살이했던 곳이니까 구경 왔을 뿐이지요. 다른 의미가 뭐 있겠어요.”
백담사를 찾은 관광객들 역시 냉랭하다. 빈정거림이 다분하다. 최고 권좌에서 물러나 머문 절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그게 궁금해서 관광객들은 백담사를 관광코스 중의 한 곳으로 잡는다.
현대판 귀양살이를 한 곳, 그곳에서 과연 어떻게 세월을 보냈을까. 극단적 영욕榮辱을 경험하며 비참하게 전락한 현장에서 또 다른 관광객은 특별한 상념에 젖는다.
“내 아들이 5․18 민주화운동 때 죽었소. 그래서….”
그들 중에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암울함에 빠져드는 이도 있고, 삼청교육대를 떠올리며 분노하는 이도 있다.
전직 대통령의 큰 후광을 입고…
어쨌든 백담사 탐방객들은 그들 부부가 머물렀던 한 칸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던 곳입니다.’
그렇게 안내문이 적힌 곳은 극락보전 앞에 있는 화엄실의 작은 방이다. 유배 중에 사용했다는 작고 초라한 생활물품을 전시한 것을 보고 필자는 속이 아리다 못해 쓰려서 곧 토할 것만 같은 구토를 일으켰다.
거기 전시된 것들은 유배생활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했는지를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는데 필자가 역겨운 건 그 전시품들이 마치 그의 고행을 추켜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였다. 그가 남긴 비참한 역사의 자취가 아직 핏물처럼 고여 마르지도 않고 있는데, 백담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배지였다는 사실만을 알리며 현대사의 아픔을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 떠난 백담사는 이미 예전의 초라한 절이 아니었다. 계곡을 낀 좁고 울퉁불퉁한 산길은 버스가 다닐 만큼 넓고 깨끗하게 포장되었으며, 나무로 만들어 폭우가 지면 떠내려갈 것만 같았던 다리는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그의 후광 덕분(?)이었으리라. 과연 만해 한용운 선생께서 후세의 대통령에게 고마워할까 하는 생각이 들자 코웃음이 흘러나온다. 관광객들이 속속 늘어나자 그곳엔 만해학교, 만해 문학박물관 등 현대식 시설의 만해마을까지 생겨났다. 그가 어떤 대통령이었는가를 떠나 대통령의 직위에 있던 사람의 유배지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지역은 큰 후광을 입고 있는 듯하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서울의 봄’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980년에 들어서자 금세라도 개나리가 필 것만 같았던 봄기운은 아예 세찬 한파가 몰아치며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유신維新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듯싶었던 ‘서울의 봄’, 그 민주화의 꿈은 다시 군홧발에 짓밟히고 만다.
육군 보안사령관의 위치에서 대통령 시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소장은 머지않아 자신의 위치를 최고의 자리, 지존으로 격상시킨다.
1979년 12․12 유혈사태,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과정에서 같은 군인들끼리 총격전을 벌여 이를 계기로 권력 공백기에 실권을 장악한다. 육군 소장이던 그는 1980년에 중장으로 진급하고 공석 중이던 중앙 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더욱 다가섰다.
1980년 5월 17일. 그날 저녁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는 국방부가 제출한 비상계엄 확대 선포 안이 찬반토론 없이 가결됨으로써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 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하는 조치와 함께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바로 그 직후부터 광주 일대를 피로 물들이더니 그 해 5월 31일, 전국 비상계엄하에 설치된 이른바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에 등극한다. 국보위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강경세력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다수가 그의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하나회 출신들이 권좌의 중심에 오른다.
그리고 1980년 9월 29일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이 공고된다. 전두환은 더욱 승승장구하여 1981년 1월 15일에 창당된 민주정의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 5,271명의 투표자 중 90. 2%를 얻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같은 해 3월 3일 임기 7년의 제12대 대통령에 정식 취임하여 제5공화국 정부를 출범시킴으로써 12·12 사태로부터 15개월여 만에 군사쿠데타에 의한 정권 장악을 마무리 지었다.
과잉충성으로 똘똘 뭉친 그의 오른팔들, 하나회의 중추세력들은 그다지 큰 수고 없이 최규하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고 전두환을 대통령직에 앉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차기 대통령 후보들은 연금, 투옥, 자격정지 등으로 두 손 두 발을 꽁꽁 묶인 후였다.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력의 막강함은 시간의 흐름보다 더 급속하게 퇴색되고 만다.
국민들의 저항과 여론에 밀리기 시작한 신군부 정부는 1987년 6월 29일 대국민 발표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발표한다. 명칭 하여 6․29 선언이다.
1노 3김으로 회자되는 당시의 대통령 선거에서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 등 전두환의 길을 그대로 답습한 육사 11기 동기생이자 절친한 친구 노태우는 대통령직까지 이어가며 어려운 정치현황을 돌파하려 야권의 김영삼 총재와 손을 잡는다.
이해타산과 야심이 얽힌 동거는 평탄할 수 없는 법. 대통령직을 물러나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전두환은 이들에 의해, 그리고 이젠 강력한 의지의 국민정서를 뛰어넘지 못하며 백담사 유배라는 고육지책苦肉之策 의 길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