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그곳에 서니 그들의 영혼이 4
네 발의 총탄을 맞고 큰 별이 지다
1949년 6월 26일 정오가 막 지날 무렵, 그날 일요일은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리만치 부서지고 있었다. 탕! 탕! 탕! 잠시 후 또다시 타앙! 한 방의 총소리가 햇빛을 갈랐다.
서대문 경교장京橋莊, 2층 거실에서 울린 네발의 총성. 백범白凡의 머리가 책상 위로 기울어지고 만다. 백범의 손은 책상 모서리를 쥐고 있었고, 확인사살까지 마친 육군 소위 안두희는 쓰러진 백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범인의 총탄에 쓰러졌고 거의 동시에 서대문서 경비 주임이 경교장으로 뛰어 들어왔어요. 그리고 잠시 뒤 군복 차림인 청년 네다섯 명이 들이닥쳐 범인을 지프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암살사건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의 수행비서로 경교장 현장에 있던 선우진은 당시의 범행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는 경찰과 군 등 당국이 이미 선생의 암살 작업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왔다는 증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945년 말부터 백범이 암살되기까지 가장 가까이서 모신 측근 중 한 사람인 그는 1949년 봄, 김일성과의 남북협상 때 백범을 수행해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회한과 죄스러움을 느끼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사건에 대한 의문점들을 떨칠 수 없다고 한다.
선우진의 삶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그렇게 경계했던 백범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역시 순탄치 않았다. 특히 자유당 시절에는 친구들조차 마음대로 만나지 못했으며, 신분을 감춘 채 숨을 죽이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된 경교장은 서울 종로구 평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현재의 소유주는 (주)삼성생명, 강북삼성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교장은 원래 금광金鑛을 경영하던 최창학의 저택이었다.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으나 광복 후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의 사저私邸로 사용되면서부터 경교장으로 명명되었으며, 광복 이후 이화장梨花莊,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건국 활동 3대 명소의 하나로 불린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백범 암살사건 뒤 체포된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곧 15년형으로 감형되고 1950년 7월 소위로 다시 임관하여 군에 복귀한다. 안두희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세상의 양지에서 버젓이 움직였으나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뒤 자신을 추적하는 이들을 피해 다니며 암행을 계속했다.
특히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 등은 은신 중인 안두희를 집요하게 찾아내 역사적인 증언을 이끌어내려고 혼신의 힘을 쏟았다. 애초 단독범행이라던 안두희는 일부 배후를 털어놓기는 했지만 계속 말을 뒤집어 진상규명작업을 혼란에 빠트리다가, 1996년 10월 23일 버스기사인 박기서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
백범 선생 암살 이후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왔던 안두희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피살돼 시신으로 들려 나오게 된 것이다. 피살 당시 안두희는 반듯한 자세로 두 손발이 끈으로 묶인 채 피범벅이 돼 있었다.
안두희의 시신 옆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40cm 길이의 피 묻은 방망이가 놓여 있었다. 안두희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추적해온 권중희의 저서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고 크게 감명받았다는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는 1996년 10월 23일 오후 7시경 경기도 부천시 심곡동에 있는 한 성당에서 자수했다. 인천 중부경찰서는 박기서를 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박기서는 재판을 받을 때까지도 자수할 당시와 마찬가지로 의로운 일에 나선 자신은 당당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안두희의 시신이 안치된 인천 시립병원에는 향불조차 피워있지 않았다. 그의 이름 석 자만이 붙어있는 썰렁한 빈소가 민족의 별을 암살한 대가가 어떠한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일촉즉발一觸卽發, 쫓기는 자의 서글픈 삶과 집요한 추적
평안북도 용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안두희는 1934년 신의주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메이지 대학교에 편입한 뒤 중국 등에서 장사를 했다. 1947년 월남해서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있는 등 우익활동을 했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 8기로 입교해 포병사령부 연락장교 소위를 맡았다.
백범 암살 후 실형 선고, 잔형 면제 그리고 장교 복귀 등을 거친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하다가 4·19 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세상의 뒤편으로 숨었다. 1961년 4월 18일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난다. 1965년에는 백범 독서 회장 곽태영이 휘두른 칼에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 민족정기 구현 회장 권중희에게 발각되어 몽둥이 세례를 받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안두희의 범행에 대한 핵심 의혹인 이승만 정권과의 결탁 여부와 상세한 배후 등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단지, 안두희에 대한 감형, 예편 후의 군수업체 운영, 이승만과 김구와의 대립, 미국의 배후 개입 등으로 볼 때 권력과 결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추정할 뿐이다.
이봉창, 윤봉길 등 청년 의인들의 의거, 그래도 멀기만 한 독립 쟁취의 길
백범, 그가 누구인가. 오로지 나라의 독립과 통일, 민족의 영달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이 아니던가. 안동이 본관이다. 본명은 창수昌洙, 구九로 개명했으며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백범白凡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자, 사건 관련자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던 백범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고, 1927년 국무위원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1932년에는 청년들 중심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하기도 했는데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가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 후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 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며, 미국 육군 전략처 OSS와 제휴, 국내 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 진공작전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일본이 전격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조차 못한 채 8·15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후에는 반탁 투쟁을 주도해 신탁통치를 위한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의를 전면 부정했다. 또다시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이 남한만의 선거를 주장하고 준비를 서두르자,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생문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라고 하며 이들과 결별,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해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 회담에 참석하며 남북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그해 5월 5일 남한에서는 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은 더욱 요원해져 갔다.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 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 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
백범은 암살되기 한 달 전 그렇게 소신을 밝히며, 이승만과의 합작은 남북통일정부가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였다.
1949년 6월 26일 서거한 김구 선생은 그해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 되었고 저서로 유명한 「백범일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