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뒷자락의 숨은벽을
수문봉으로 환생시키다

<겨울산행 4> 북한산 숨은벽 능선에서의 사색

by 장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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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또 하나 명품코스인 숨은벽 능선을 찾았다. 숨은벽 능선은 추위도 드세고 연이틀 내린 눈으로 얼어붙은 구간도 많다. 들머리 사기막골에서 오르는 숨은벽 능선길의 계곡은 말할 것도 없이 꽁꽁 얼어버렸다.

주말에 많은 산을 동행하며 산의 개념을 일깨워준 친형과 후배 계원이랑 셋이 동장군과 맞닥뜨리려 왔다.

술이 맛있어 혼자 술 마시겠는가. 원수와 술자리 함께 하는 일이 흔하겠는가. 그 자리에 내가 사랑하는 이, 나를 좋아하는 이가 있으므로 해서 술맛 거나하고 얼큰 취기 달아오르는 것 아니겠나.

그들과의 산길은 세찬 바람 뺨을 굳게 해도, 계곡물 단단히 얼어붙었어도 마냥 훈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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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EFC504D4E3AA723 길이 얼어 더욱 가파른 숨은벽 등허리
그 봉우리는 결코 숨어있지 않았다. 위대한 두 개의 거봉巨峰에 다만 가려있을 뿐이었다


숨은벽이라니, 그댄 지금부터 수문봉일세


백운대와 인수봉에 가려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갖지 못했네.

북한산, 거기서도 이만 치나 높은 곳이 아니었으면

숱한 산사람들 눈길 듬뿍 받으며 어엿이 어깨 폈을 터

거대한 고봉 틈새에서 끼고돌아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 능선

어찌 그렇다 하여 이 멋진 암봉岩峰을 벽壁이라 칭하며

그것도 숨었다는 수식어로 폄하하는가.

동서고금을 막론, 호사스러운 영웅에겐

뛰어난 재상, 용맹한 장수가 존재하는 법

그대 수문봉이여!

백운대가 진시황이라면

그댈 어찌 여불휘에 견주지 못할쏜가.

인수봉이 유방이라면

그댈 어찌 한고조의 일등공신 장량과 한신에 버금간다 못할쏜가.

이제 내 기록에 그대는

최고봉의 관문이요, 으뜸인 길목 봉우리

수문봉首門峰으로 다시 태어났음이네.


182D183D4D4F3E2A2D 백운산장으로 가는 내리막길이 무척 조심스럽다.


토끼해 2월

헐거워진 활엽수

가지 앙상하여 을씨년스럽고

한파에 눌어붙어 얼어붙은 적설

안쓰럽긴 하나 그래도

강풍 견뎌내고

내 달 아님 그 담달에라도

새 살처럼 활짝

꽃 피우기 위해

기둥 줄기 꿋꿋이

힘들어간 모습에서

나는 지금

봄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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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4C514D4F4D3712 인수봉을 배경으로 영봉에서



북한산 숨은벽 능선에는

벌써 잔설 녹이는

산들바람 이는듯하다.


인수봉으로 흐르는

새날, 새봄

그 힘찬 기운들이

양지쪽 암벽을 타고

휘감아 오르는 듯하다.


영봉으로 돌아와

눈앞 근엄한 인수봉 바라보니

거기, 이미 봄이 도착하여

뻐꾸기, 진달래, 아지랑이….

제 식구들을 불러 모은다.


삶이 아름답단 걸 알려주는 멜로디

생기 넘치는 색감

활기찬 율동

묻어나는 것마다 봄,

뿌려지는 것마다 봄


혹독하기 이를 데 없던 추위

인고의 계절 보낸

헐거운 나목마다

연분홍 탄생의 모습

그 계절 긴 동면은 비록 혹독했을지언정

생생한 잉태의 시간이었다.



영봉靈峰, 거기서 만난 어느 중년 사내의 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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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굉장히 무겁고 굉장히 그늘졌으며

딱딱하게 굳어진 슬픔이 그 사람의 뒷모습에 푹 배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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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으려던 햇살마저 구름 덮으니 세상은 마치 그의 허름한 등짐마냥

사그라들듯 잿빛 그늘로 바뀐다.

전혀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그렇다고 축 처져 힘이 빠진 걸음도 결코 아닌….

그렇게 걸으며 그는 영봉으로 올라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작위적인 상상을 펴게 한다.

어쩜 너무 원초적 상상이어서 그의 깊은 수심을 가벼이 농락하는 것일지도 모를…,


1451864C4D4F4E2A25 영봉과 마주한 인수봉


그의 친구와 그는 자일을 몸에 두르고 또 서로를 엮어

인수봉 암벽을 타고 있었다.

앞선 그의 실수였을까 아님 늘 유지했던 밸런스가 무너졌을까

친구는 인수봉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묵연히 인수봉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지금도 살을 녹이고 애간장 태웠을 그날의 표독스러운 추억이 요철처럼 각인되는 듯 보인다.

이십 년, 아니 그보다 훨씬 긴 세월 동안 그의 젊음, 그의 미래는

북한산에서 답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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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봉은 명명한 그대로 북한산 특히 인수봉에서 산화散華된 산사람들의 영靈을 기리는 봉우리

저처럼 위엄 있고 저처럼 자상한 암봉을 그렇다한들 어찌 원망할쏜가.

사내는 그래서 평생 스스로의 업보로 짊어지고 매일 이 맘 때쯤, 아니면 이틀에 한 번 영봉을 찾아

친구의 혼을 기리고 자신을 탓하는지 모르겠다.

짧지 않은 묵상 후 바위틈 비집고 내려가는 그의 영혼이 자학自虐의 자락에 매인 거라면

얼른 풀어 이젠 친구의 혼까지 편하게 해 주었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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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그가 돌아선 바위에 영필靈筆처럼 진한 설흔雪痕이 그만 놓아주라는 부적처럼 도드라지더니

켜켜이 주름 굵은 노송마저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몸 비틀어 끈적끈적한 송진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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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C54C4D4F5D5538 육모정고개 하산로



숨은벽을 수문봉으로 개명改名하고 하산하는데 언제 누구와 와도 북한산은 설렘이고 감동이며, 환희를 안겨주는 곳이란 생각에 달라짐이 없다.

그렇게 겨울산행의 개운함 중에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존엄한가에 대한 깨달음이 부록처럼 끼워진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이 살아있는 이의 가슴에 얼마나 상처를 주는 건지, 그 느낌이 오롯이 돋아난다.



때 / 겨울

곳 / 효자리-사기막골-숨은 벽 능선-전망대 바위-백운산장-하루재-영봉-육모정고개-우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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