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되려면 아주
우연히 만들어진대요

콩트

by 장순영

“쯧쯧,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


윤 기사는 숭례문 앞을 지나면서 투덜거렸다. 룸미러로 보이는 국보 1호는 그 위용도, 가치도 전혀 남아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애꿎은 남대문에 불을 지른 늙은이도 그렇지만 그걸 몇 년째 보수하면서 공사비를 떼먹어? 우라질 놈들 같으니….”


윤 기사는 혼자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신세계백화점 쪽으로 차를 몰았다. 용산 국제빌딩 앞에 손님을 내려주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사람도 택시를 타려는 사람이 없었다.

윤 기사는 사납금조차 맞추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은근히 부아가 돋는 중이었다. 다시 둘러봐도 남대문시장 주변에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신세계백화점 앞에 차를 대놓고 잠시 오늘 번 수입을 헤아리려는데 백화점에서 여자 손님이 막 나오더니 두리번거리는 게 보인다.

스파게티처럼 파마한 중년의 여자가 끙끙거리며 커다란 짐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윤 기사는 얼른 차를 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고맙습니다. 마침맞게 택시가 왔네요.”

“하하하, 손님 오실 줄 알고 미리 기다렸지요.”


윤 기사는 제법 큰 포장박스를 트렁크에 싣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먼저 뒷좌석에 오른 여자가 말끝을 흐린다.

“좀 멀리 가야 하는데….”

“어디든 말씀만 하십쇼.”


어디든 못 가랴. 요즘처럼 손님 태우기가 힘들 때 장거리 승객이야말로 가장 반가운 손님이다.


“대구까지 가야 하는데.”

“대구요?”


윤 기사는 짐짓 곤란하다는 듯 대응하면서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대구는 왕복요금을 주셔야….”

“왕복요금과 통행료를 낼 테니 가능한 한 빨리 좀 가주실 수 있을까요.”


귀부인 티가 나는 여자 손님은 후한 인심을 쓰면서 동시에 서둘러주기를 부탁했다. 그러잖아도 서둘러 다녀와야 교대시간에 맞출 듯싶었다. 윤 기사는 바로 출발해서 고속도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천안휴게소에서 음료수와 햄버거 두 개씩을 사 들고 뒷좌석에 오른 스파게티 파마 아줌마는 햄버거 포장을 반쯤 펼쳐 먹기 좋게 해서 윤 기사에게 권했다.

파마 아줌마의 시댁은 대구 인근의 경산에서 과수원을 하며, 둘째 며느리인 그녀는 남편과 함께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도매상을 한다고 했다. 오늘 저녁에 대구 G 호텔에서 열리는 시아버지의 팔순 잔치에 가는 길이라고 한다.


“물건 내보내고 가느라고 늦었지 뭐예요.”


그녀는 먼 길의 운전자가 지루하지 않게끔, 간간이 맑은 웃음소리를 내가며 얘기를 풀어나갔다.

교양과 품위를 적당히 갖춘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윤 기사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차를 몰았다.

경부고속도로는 약간의 정체 구간 말고는 충분히 속도를 낼만큼 여유로웠다. 맑고 쾌청한 초봄 날씨에 노란 개나리 꽃잎이 윤 기사의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했다.


- 더도 말고 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윤 기사는 오전 내내 손님을 찾아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은 사실도 까맣게 잊고 모처럼 여행 떠나는 기분에 젖어들었다.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사업을 정리한 지 1년, 먹고살 궁리를 하다가 택시 운전을 시작한 게 반년 남짓 된다. 솔직히 단 한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다. 겨우 몇십만 원의 월수입으로 버텨오면서도 달리 방안이 없어 핸들을 놓지 못하고 있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학력이나, 크진 않지만 어엿한 중소제조업체의 사장이었다는 이력은 이제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걸 떠벌리는 자체가 제 얼굴에 침 뱉는 것처럼 흉이 되고 만 게 지금의 현실이다.


- 아아, 얼마나 오랫동안 얼굴을 펴지 못하고 살았던가. 또 얼마나 더 찌푸린 하늘을 보며 한숨을 지어야 할 것인가.


윤 기사는 룸미러를 통해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제 얼굴을 흘깃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 모처럼 쌈빡한 기분을 흉한 생각으로 망치지 말자.


“기사님,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지만….”


잠시의 침묵을 깨고 파마 아줌마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쇼.”

“기사님은 택시 운전하실 분처럼 보이지 않아서요.”

“택시 운전하는 사람이 따로 있나요,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기사님은 왠지 택시 하곤 어울리지 않아요.”

“좋게 봐주시는 거죠?”

“호호호, 네.”

“작년 초까지 조그맣게 사업을 하다가 홀랑 망했거든요. 하하하!”

“그러셨군요. 무슨 사업을 하셨어요?”

“아웃도어 제품 공장을 했었습니다.”

“아웃도어면?”

“주로 등산복을 생산했어요.”

“어머! 등산복이요?”


파마 아줌마는 몸을 일으키며 반색을 했다.


- 아, 의류 유통이랬지.


윤 기사는 아줌마가 반색하는 이유를 감 잡았다.


“공장을 직접 운영하셨나요?”

“네. 디자인부터 생산에…, 시장개척도 했고요.”

“직접 마케팅도 하셨군요.”

“…….”

“제 남편이 등산의류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전, 더 벌리는 걸 원치 않는데 남편은 자꾸 등산용 제품에 손대고 싶어 안달이더라고요.”

“아, 그러시군요.”

“등산 인구가 천정부지로 늘어나는 데다 부가가치가 무척 높은 편이라면서.”


맞는 말이다. 틀리지 않은 판단이다. 그러나 윤 기사는 다소 톤이 높아진 그녀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제기랄, 그때 부도만 맞지 않았더라도 지금 택시 모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티셔츠와 바지, 조끼와 양말을 생산하는 정도였지만 좀 더 기반이 잡히면 겨울용 파카와 점퍼까지 생산 규모를 넓혀갈 생각이었다.

윤 기사는 지난 일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납품대금으로 받은 수십 장의 어음이 하나같이 휴짓조각이 되어 남아있다. 세상은 자기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한만큼 얻어지는 게 절대 아님을 윤 기사는 사업을 하며 뼈저리게 깨우쳤었다.

생사고락을 같이하자던 아웃도어 판매업체의 박 사장은 저만 살려고 잠수해버렸다. 3억 원이 넘는 완제품 납품대금을 대손貸損으로 처리하게 하고 해외로 날라버린 것이다.

수년간 의류 원단을 팔아 돈깨나 긁어모았던 김 사장은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싹싹하게 굴며 원단을 공급해주더니 납품처의 낌새가 불안 하자 제일 먼저 공장 기계를 압류했다.

회사 장부는 온통 빨간 줄, 빨간 글씨 투성이었다. 윤 기사, 아니 윤 사장은 돌아버리기 직전에 공장을 처분하고, 폐업신고를 냈다.

다시는 의류에 손대지 않으리라.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업종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경기가 침체하였고 앞으로도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온통 먹구름 속에 가려있다시피 했는데 그 먹구름을 뚫고 빛을 보려는 이들은 대개 양두구륙羊頭狗肉의 가면을 쓴 자들이었다.

저 살기 위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의식구조, 사회 전반에 만연된 이기주의. 불황을 더 악화시키는 건 정의의 부재不在였다. 사업가는 없고 장사치만 있었다. 신뢰는 땅에 곤두박질쳤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다.


- 그간 비싼 수업료 냈다며 나 자신을 추스르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노숙자 신세가 되어있을지도….


윤 기사는 은근히 파마 아줌마의 화제가 바뀌기를 바랐다. 지난날이 너무 아리다. 아직도 편안하게 들어줄 화두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아주머니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이거, 저희 매장 명함이거든요. 언제 쉬시는 날 한 번 연락 주실래요.”


남대문 B 상가, 운동복과 작업복에서 점퍼와 코트까지 한눈에 봐도 다양한 의류를 종합적으로 취급하는 도매업체라는 걸 알 수 있다.


“호호! 잘하면 윈윈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기사님도 다시 한번 재기하실 기회가 생길 수도 있고 말예요.”


- 윈윈? 재기?


순간 윤 기사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의식했다.


- 내가 다시 택시를 몰지 않고도 살길이?


윤 기사는 룸미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고 진솔해 보였기 때문이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윤 기사는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닌데….”

“사모님 뜻은 잘 압니다만….”


파마 아줌마의 호칭이 손님에서 사모님으로 바뀌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지금 남편이 그쪽 시장으로 바삐 뛰고 있거든요. 근데 한 번도 등산의류엔 손대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기사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바로 휴대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 저예요. 지금 택시로 가고 있어요. 여기가….”

“곧 대구 시내로 들어설 겁니다.”


어디쯤 오고 있느냐는 남편의 물음에 답하게끔 윤 기사는 얼른 위치를 말해주었다.


“곧 도착할 거예요. 그건 그렇고요. 제가 타고 가는 차의 기사님이 등산복 공장을 하셨던 분이세요.”


1, 2분가량 부부의 대화가 이어졌다. 전화를 마친 파마 아줌마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밝아졌다.


“그냥 가시게 하지 말고 호텔 뷔페로 모시고 오래요. 남편이 기사님을 뵙고 싶대요.”

“그래도 가족들 경사 장소에 제가 어떻게….”

“어차피 식사하고 올라가셔야 하잖아요. 지체되는 시간만큼 요금계산을 더 해드릴게요.”

“사모님!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알아요. 저희나 기사님한테 좋은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겠어요.”


두 번이나 거푸 말꼬리를 자르는 바람에 윤 기사는 더는 대꾸할 수도 없었다.


“인연이 되려면 아주 우연히 만들어진대요. 호호호!”


윤 기사도 따라 웃었다. 아주 우연하게 멋진 인연이 이뤄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윤 기사는 대구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며 들뜨기까지 했다.


- 아아! 만약에 일이 잘 풀린다면….


택시 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현실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모든 걸 자포자기한 상태에서의 기막힌 반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예전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긴 했었다. 다만 그런 현실을 만들기에는 너무나 가진 게 없었고 많이 지쳐있었다.

공기가 다 빠져버린 타이어처럼 혼자의 힘으로는 굴러갈 여력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진작 희망을 버린 상태였다.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지탱해나간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게다.

윤 기사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단순히 장거리 손님이라고 여겼던 승객이 은인처럼 여겨졌다.

갑자기 운전도 조심스러워졌다. 모시게 될 사장님의 아내, 그녀는 이미 사모님이었다. 파마 아줌마에 대한 인식이 서울에서 출발할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윤 기사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대구시청 방향으로 우회전을 받으려고 차선을 변경했는데 사모님이 현금인출기 창구를 가리키며 잠시 세워달라고 한다.


“현금을 조금 찾아야겠어요. 조카들 용돈이라도 주려면 잔돈이 좀 필요할 거 같아요.”


윤 기사는 비상등을 켜고 S 은행 인출기 앞에 차를 세웠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예.”


현금인출기 창구로 들어서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우아한 기품을 보게 된다. 듣건대 신세계백화점에서 산 선물, 뒤 트렁크에 실린 선물만 해도 얼추 수백만 원어치는 넘는 것 같다.

그녀는 시아버지 선물도 선물이지만 시부모 모시고 과수원 일까지 도맡아 하는 손윗동서한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선물 구입비용이 약간 과하게 지출됐다면서 웃었다.

윤 기사는 장래 사모님이 될지도 모를 그녀가 제대로 된 여자라고 단정했다. 교양과 인격을 지닌 데다 푸근한 정과 살가운 배려까지 두루 갖춘 여자다. 가화만사성, 그런 여자를 아내로 둔 남편이니 사업도 번창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인출기 창구에서 나온 그녀가 약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부랴부랴 차에 올랐다.


“온라인이 정지됐다지 뭐예요. 이래서 지방은 서울과 자꾸 비교돼요. 뭐가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쳐놓아야지.”

그녀는 지갑을 열어 몇 장의 수표를 꺼내더니 “어쩌지, 백만 원짜리밖에 없는데….”라고 말하며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시계를 보더니 “늦었는데 다른 은행에 들를 수도 없고.”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윤 기사는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진행 방향을 잡을 것 같아 망설였는데 그녀는 무언가 생각이 떠올랐는지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기사님! 지금 현찰 가지신 게 얼마나 있으세요?”

“예? …어디 보자. 한 16만 원쯤 있네요.”

“잘됐네요. 저한테 현금이 4, 5만 원쯤 있으니까 20만 원은 맞출 수 있겠네요. 도착해서 드릴 테니까 일단 가지신 돈을 저를 좀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시죠.”


윤 기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잔돈을 제외한 만 원짜리 열여섯 장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리고 다시 G 호텔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잠시 후 그녀가 은행을 가리키며 잠깐 세워달라고 한다.


“아무리 잠깐이지만 기사님한테 돈을 빌리는 게 왠지 경우가 아닌 거 같네요. 호호!”

“괜찮습니다, 사모님!”

“아녜요. 금방 찾아올게요.”


윤 기사는 다시 은행 앞에 차를 댔다. 그녀는 부리나케 은행으로 들어갔고 윤 기사는 차를 10여 미터 앞으로 뺐다. 건널목을 지나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내려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목적지인 G 호텔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끝까지 좋은 인상을 심어주자. 청결한 모습까지도. 윤 기사는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새로운 사장한테 등산의류 생산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때 자신은 지금의 택시기사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일 거였다. 차분하고 지적이며 풍부한 경험이 몸에 밴 베테랑으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아내도 기뻐할 것이다. 남편이 택시 모는 걸 아내는 안타까워했고 늘 불안해했다.


- 여보, 다시 기회가 온 것 같아.


상기된 뺨을 쓸며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아직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KakaoTalk_20220117_131617095_08 (2).jpg


대구 시내 중심에 있는 G 호텔 뷔페에는 팔순 잔치가 진행되지도 않았고 예약된 행사조차 있지 않았다.

윤 기사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뷔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파마머리 사모님도 보이지 않고, 팔순은커녕 단체모임조차 없었다. 순간 윤 기사는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은행으로 들어간 파마머리 아줌마가 나오지 않자 윤 기사는 은행으로 갔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겨우 10여 미터 앞으로 차를 뺐을 뿐인데 그녀가 차를 보지 못하고 혼자 G 호텔로 갔다는 게 의아스러웠다. 그러면서도 G 호텔에 가면 만날 거라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윤 기사는 호텔 밖으로 뛰어나가 후다닥 트렁크를 열었다. 파마머리의 선물박스를 들어내고는 냅다 포장지를 뜯었다.

아아!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나다니. 이따위 저주스러운 일이 또 나한테 생기다니. 포장 상자를 푼 윤 기사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박스 안에는 또 하나의 박스가 들어있었고 그 안에는 금방이라도 깨질 듯 금이 간 유리병에 모래가 잔뜩 들어있었다. 박스와 병 사이에는 너절한 신문지 뭉치가 잔뜩 채워져 있다.

쓰레기나 다름없는 내용물은 포장만 그럴듯하게 해서 수백만 원어치의 선물처럼 행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병 속의 모래를 한 줌 움켜쥔 윤 기사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재기의 희망을 쥐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신기루가 걷히자 분노가 솟구쳤고, 이내 참담해지고 말았다.


“이런 점포는 여기서 못 봤는데.”


다음날, 윤 기사는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가누지도 못하고 남대문시장 B 상가에서 파마머리가 준 명함을 보여주며 물었으나 대답은 실망만 가중할 뿐이었다.


“여기 상가는 의류완제품보다 대부분이 단추나 지퍼 등 부자재를 취급하는 상점이라오.”


역시 파마머리의 흔적은 아무 데도 남아있지 않았다.

KakaoTalk_20220119_013954538_12.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자빠지고 코 깨지고